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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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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6 로마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 형제란 좀 복잡한 존재 같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나와 공유하는 평균 50퍼센트의 유전자만큼 심적으로 가깝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완전한 타인인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는 고민을 형제와는 나누어 본 적도, 나눌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마냥 데면데면한 사이는 아니다. 형제는 나의 어린 시절 추억과 가족사를 공유한다.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생각과 감정이 있어서 때로는 무척 가깝고 편하게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 역시 어린 시절을 통해 켜켜이 쌓여있어서 피에 근거한 유대감이 아무리 강해도 어떤 지점에서는 자석의 같은 극끼리 죽어라 밀어내고 맞지 않기도 한다. 며칠 씻지 않아 꼬질꼬질한 모습도 그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을만큼 서로를 의식하지 않지만, 밖에서 ..
ep #5 팔랑귀 때문에, 셀프 워킹 투어 로마 숙소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화장실을 혼자 쓸 수 있다는 거였다. 도미토리에 묵을 때처럼 '언제 씻으러 가야 하나' 하는 눈치 싸움을 할 필요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헛구역질을 하며 화장실 입구에서 백스텝을 할 필요도 없다. 느지막히 일어나 화장실을 쓰고 싶은만큼 쓸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프라이빗 룸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 숙소'여서 좋았던 또다른 점은 어쩐지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프렌들리한 성격이었다. 호스트 마릴레나도, 이날 오후 마주친 그녀의 남자친구 지안루카도, 심지어 오랜만의 아날로그 열쇠에 쩔쩔매는 나 대신 숙소 대문을 열어준 현지 할아버지까지도 생면부지 동양인인 나에게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먼저 말을 걸고 선뜻 도와주었다. 이날 아침 마..
ep #4 로마 명소 벼락치기 한여름 피렌체는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여행자의 플래시몹 성지 같은 곳이었다. 유럽이나 북미에서 온 듯한 가족(아이가 열댓살 정도면 열에 일곱은 미국식 영어 발음이었다), 걸음은 느리지만 언제든지 돈 쓸 준비가 된 연로한 일본인 관광객, 카메라에만 돈을 쓴듯 생전 처음 보는 대포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중국인 등등... 그 다양한 타입의 여행자가 작열하는 7월 피렌체의 태양 아래에서 다같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모습이, 피렌체에서 본 가장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이탈리아에 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사람 구경 실컷 한 피렌체를 떠나 가볼곳 천지인 로마로 향했다. 같은 방의 한국인 언니와 기차 시간이 비슷해 함께 숙소를 나섰다. 친절한 호스트에게 직접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 사이 어디로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아쉬운..
ep #3 발도장만 찍고 온 친퀘테레 꼭 친퀘테레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피렌체의 태양이 나를 반쯤 태워놓았거든. 35도 가까이 치솟은 한낮 기온도 기온이지만 피렌체의 햇볕은 유독 따갑고 눈부셨다. 반나절 동안 별 하는 일도 없이 피렌체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보니 이탈리아의 한낮에 '감히'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년 전, 정오 무렵 기온으로 47도를 표시했던 스페인 세비야 시내의 어느 기온계를 떠올리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여름 폭염과 햇살은 사람의 진을 빼놓는 무언가가 있다. 잠시 열을 식히려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맞은편 침대에는 막 체크인한 듯한 낯선 여자가 짐을 풀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침대에 앉아 아이폰을 들여다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쳐다봤더니 그 룸메이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마주쳐 인사를 ..
ep #2 열정과 찜통 사이, 7월의 피렌체 두 눈이 번쩍 뜨인 건 한밤중이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곤히 자던 나를 깨운 건 같은 방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였다.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아이폰을 켜니 새벽 서너 시쯤이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전까지 밀라노 아니었어? 생각거리가 생기니 잠이 깨는 건 금방이었다.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내렸던 순간의 장면부터 되짚어 보자.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두어 시간 달렸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플랫폼이 가까워지는 장면도 떠올랐다. 플랫폼을 서성이는 수많은 배낭족을 제치고 길을 건너 햄버거 가게를 지났다. 역 앞에서 코카콜라 프로모션을 했던 것 같은데 나, 그 공짜 콜라 받았나.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걷는 동안 직사로 내리꽂히던 햇볕. 정수리가 타는 듯해 '모자를 가져올걸' 후회했던 것도 생..
ep #1 갑자기 떠나는 길 여행의 계기는 조금 갑작스러웠다. 그해 여름, 나를 좋게 평가한 분들의 제안으로 어떤 일을 이제 막 시작한 터였다. 나한테도 감히 휴가라는 게 있기는 할까, 어디로 떠날 수는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일에 빨리 적응할 궁리부터 하는 게 당연한 자세라는 생각에 휴가는 포기한 참이기도 했다. 어느날 점심식사 자리에서 휴가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이번 수다는 나에게도 휴가 계획을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일에 임하는 의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말이 '고도의 계산된 답변'으로 해석될 만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 이참에 유럽 다녀와 버려. 얼마나 쉬어도 되길래 유럽 이야기까지 나오나. 일주일도 괜찮다는 말에 바로 그날 밤부터 이틀을 꼬박 새서 비행기 표를 샀다. 언제 또 쉴지 모르니 과감하게 떠나버리라는 부추김에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