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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6 Roman Holiday

ep #5 팔랑귀 때문에, 셀프 워킹 투어

 

 

로마 숙소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화장실을 혼자 쓸 수 있다는 거였다. 도미토리에 묵을 때처럼 '언제 씻으러 가야 하나' 하는 눈치 싸움을 할 필요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헛구역질을 하며 화장실 입구에서 백스텝을 할 필요도 없다. 느지막히 일어나 화장실을 쓰고 싶은만큼 쓸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프라이빗 룸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 숙소'여서 좋았던 또다른 점은 어쩐지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프렌들리한 성격이었다. 호스트 마릴레나도, 이날 오후 마주친 그녀의 남자친구 지안루카도, 심지어 오랜만의 아날로그 열쇠에 쩔쩔매는 나 대신 숙소 대문을 열어준 현지 할아버지까지도 생면부지 동양인인 나에게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먼저 말을 걸고 선뜻 도와주었다.

 

이날 아침 마주친 바(bar) 사장도 그랬다. 마릴레나는 직접 조식을 차려주지 않고 대신 근처 바에서 커피와 빵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쿠폰을 주었는데, 어떻게든 현지인과 말 한 마디를 더 섞을 기회여서 기꺼운 마음으로 바를 찾아갔다.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주문해 본 적이 없다는 나에게 그럼 에스프레소를 마셔보라고 권하고, 크로아상과 초콜릿 데니쉬를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이 모든 걸 준비하면서도 그는 그날 처음 보는 나를 마치 오랜 단골처럼 대했고, 나에게 어디서 왔냐, 이탈리아 어디를 여행했냐, 다른 유럽 국가도 여행해 봤냐를 쉼없이 물어댔다. 말 끝마다 '라 벨라'를 붙여서. 안 그래도 피렌체에서부터 그 말을 들어서 '내가 이탈리아에서 통하는 얼굴인가' 하는 착각이 스멀스멀 오르고 있었는데, 바 사장까지 친근한 말투로 그렇게 부르니 이게 그 유명한 이탈리아인들의 습관성 립서비스라는 걸 알면서도 진짜 단단히 착각하게 되더라니까(유죄 인간들...).

 

내가 로마에 언제 왔고 언제 떠날 건지를 궁금해 하는 바 사장에게 "어제 와서 모레 간다"고 대답했다. 로마에서는 사흘을 묵고 휴가는 다 합쳐서 일주일 남짓이라는 내 말에 사장이 하도 기겁해서 뭐가 심각하게 잘못된 줄 알았다. "사흘! 사흘이라고! 로마에서?!" 그러고 보니 전날 마릴레나랑 같은 리액션이네. 사장은 로마에서 3일만 있는 건 너의 불운이라며, 휴가를 짧게 준 네 보스는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침을 튀겨가며 나 대신 분노했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휴가가 너무 짧아, 라 벨라! 로마는 세 달을 있어도 모자라다고!"(나도 공감이야...)

 

그는 로마에 정 사흘 밖에 있지 못한다면 쭉 걸어서 둘러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로마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거야"라나. 마릴레나도 지안루카도 꼭 걸어서 여행하라고 했었다. 이쯤 되니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말하자고 짠 거 아냐?'라는 의심까지 들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셀프 워킹 투어를 권하니 걷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마 첫날 지하철을 탔다가 당한 암내 공격의 충격을 또다시 감내할 자신도 없었고(그때 올렸던 인스타를 다시 봤다. '내가 파리 지하철도 타 봤지만 파리 지하철보다 더 더러운 지하철을 타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라고 썼네) 그날 로마는 피렌체에서처럼 햇볕도 강렬하지 않았다. 그래, 걷는다 걸어.

 

 

 

#1

가장 먼저 간 곳은 포폴로 광장이었다. 왜 포폴로였냐 하면... 그곳이 정말로 '걷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날의 일정 자체가 '왜 때문이었는지' 구체적인 기억이 많지 않지만, 지도를 보며 그날 갔던 곳을 되짚어보니 정말 셀프 워킹 투어를 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로마에서도 명소가 모인 곳을 걸어서 트라스테베레까지 내려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가이드북에 서민적인 지역으로 소개된 트라스테베레를 보고는 가고 싶어했던 게 어렴풋이 떠오른다. 거기서 저녁을 먹어야지라고 루트를 계산했던 것까지 기억나는데...

 

아쉽게도 트라스테베레까지 가지는 못했다. 로마 사람 3명이 부추긴다고 진짜로 걸어서 여행할 생각을 한 게 패착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난 팔랑귀인 동시에 오래 못 걷는 종이 인형이라는 걸 기억해야 했는데... 언젠가 다시 로마에 가면 트라스테베레는 꼭 한 번 가고 싶다.

 

잠깐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

 

 

 

 

 

포폴로 광장은 로마에서도 북쪽에 있어 명소 대부분이 있는 구역을 일직선으로 걸어 내려가기 좋았다. 게다가 포폴로 광장 정면으로 쭉 뻗은 대로는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유명한 유적지나 미술관과 어느 방향으로든 맞닿아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로마를 둘러보기 딱 좋은 코스였는데, 이 속 편한 길의 이름은 비아 델 코르소, 로마의 대동맥이라고 부르는 코르소 거리였다.

 

 

 

포폴로 문(Porta del Popolo)

 

 

로마의 관문이라고 부르는 포폴로 문. 지금은 테르미니 역이 로마 여행의 시작이자 끝이지만 그 전까지는 포폴로 문이 로마의 입구였다. 이탈리아 여행을 하러 독일에서부터 쭉 내려온 괴테가 이 문을 지나면서 드디어 로마에 왔다며 감격했다는 썰이 있다. 아, '이탈리아 기행'도 언제 읽어봐야 하는데...

 

 

성 베드로(L)                                                                                                                                  성 바울(R)

 

 

'이 조각상들은 누구세요...?' 우피치 외벽의 조각상들이 피렌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으니 이 사람들도 로마와 깊은 관련이 있을텐데...까지만 생각하고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 한참 잊고 있었는데 구글 이미지 검색 왈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라고 한다. 6년이나 지나서 이제야 이걸 찾아본 나도 참... 베드로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자 초대 교황이고 바울은 신약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다. 진짜 기독교 본산지 로마의 입구에 조각상이 만들어질 만한 사람들 맞네.

 

만화 성경 전집을 열 번 넘게 통독한 어린이였지만 기독교 이야기는 깊이 못하겠다. 중학생 때 발길을 끊은 이후로 교회에는 국수 먹으러 가기만 해서 아는 게 없다(...). 그냥 저 두 사람 킹왕짱이라는 것 밖에.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이 앞에서 셀카 찍었는데 겁나 유명한 성당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인 줄 알았는데ㅋㅋㅋㅋㅋ

이 글 쓰면서 아는 게 더 많다. 부끄럽구만...

 

 

 

 

지금 안 엄청난 사실 또 하나. 여기서 강남 스타일 플래시몹을 했다는 거... 싸이가 대단한 거야, 포폴로 광장이 로마의 센터인 거야;;;

 

 

 

#2

포폴로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핀초 언덕으로 올라갔다. 까마득히 높아보였던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도 시선보다 아래에 있을만큼 생각보다 높은 곳이었지만 오르는 길이 힘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벨리스크, 참 유럽 곳곳에서 눈에 띈다.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도 봤는데... 전날 본 콜로세움 근처의 개선문들과 이 오벨리스크를 보며 유럽의 문화와 역사가 로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짚어 보게 된다. '세계의 중심은 로마'라는 로마인들의 관념과 의식은 아우구스투스가 가져온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와 로마 황제들의 개선문에서 파리의 개선문과 오벨리스크로 이어지는 듯 하다. 그 자신감이 얼마나 당당한지,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잘 알겠는데, 지금의 나는 여기서 읽히는 우월감이 좀 불편하다.

 

물론 여행할 때는 이런 생각을 못했지. 그냥 광장 전경에 속이 뻥 뚫리는 묘한 해방감을 느끼다가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왔다. 로마의 검은 돌길은 유독 반질반질했고 핀초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이 완만해도 역시 미끄러웠는데, 여기를 아무 생각 없이 터덜터덜 걷다가 대차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너무 창피했다(ㅠㅠ).

 

 

 

 

 

 

 

내 고물 노트북의 메모리가 이 사진들을 감당을 못하네ㅠ 다음 이야기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