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록: Voyage/'16 Roman Holiday

ep #3 발도장만 찍고 온 친퀘테레

 

 

꼭 친퀘테레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피렌체의 태양이 나를 반쯤 태워놓았거든. 35도 가까이 치솟은 한낮 기온도 기온이지만 피렌체의 햇볕은 유독 따갑고 눈부셨다. 반나절 동안 별 하는 일도 없이 피렌체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보니 이탈리아의 한낮에 '감히'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년 전, 정오 무렵 기온으로 47도를 표시했던 스페인 세비야 시내의 어느 기온계를 떠올리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여름 폭염과 햇살은 사람의 진을 빼놓는 무언가가 있다. 잠시 열을 식히려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맞은편 침대에는 막 체크인한 듯한 낯선 여자가 짐을 풀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침대에 앉아 아이폰을 들여다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쳐다봤더니 그 룸메이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마주쳐 인사를 하고는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왔는데. 별 생각 없이 대답하니 그럴 줄 알았다고 한다. 네 얼굴이 깨끗하고 하얀 걸 보고 딱 한국 사람인 걸 알았다나. 생각지도 못하게 '피부 좋다'는 칭찬도 받고 국뽕도 맞아서 으핫핫, 멋쩍게 웃기만 했다. 속으로 '내 선크림 백탁이 그렇게 심한가'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용케 그 드립을 안 치고 참았네.

 

홍콩에서 온 룸메이트는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그 친구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깔끔한 발음의 영어를 들으며 귀국길에 들를 홍콩에서의 소통에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 친구는 정작 한국인인 나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한국 칭찬을 늘어놓고 내가 쓰는 화장품이 뭔지 물어보며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그러더니 이제 어디를 갈 거냐며, 자기는 친퀘테레에 갈 생각이라는 말을 하고는 직접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같이 갈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잠깐 생각해 보는 척 하다가 거절했다. 홍콩 룸메이트의 발랄한 붙임성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에 대한 그 친구의 환상을 나는 도저히 충족시켜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피곤하기도 했고. 마찬가지로 혼자 여행왔다는 룸메이트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피렌체에서의 짧은 일정을 이유로 들었다.

 

웃긴 건 그날 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돌아오고서 친퀘테레에 가 볼 생각을 했다는 거다.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하지만)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야경까지 보고 오니 '피렌체는 웬만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택도 없는 생각이었다) 남은 하루를 어디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되었다. 근교로 나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기차역으로 달려가 친퀘테레로 향하는 표를 샀다.

 

 

 

#1

내 앞에 줄 선 사람이 엄청나게 큰 검은개를 데리고 있던 게 뜬금없이 떠오른다. 셰퍼드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큰 개가 얌전하게 주인에게 찰싹 붙어있는 것도, 그런 개를 귀여워하는 것도 왠지 '유럽스러웠'다.

 

피사를 지나 점점 시골 산자락으로 들어가던 기차가 라 스페치아 역에서 멈췄다. 이곳에서 친퀘테레 패스를 샀다. 전날의 블로그 벼락치기로 얻은 정보는 여기까지. 아는 게 없으니 역무원이 패스와 같이 챙겨준 친퀘테레 지도를 보고 갈곳을 정했다.

 

여행지 후보는 친퀘테레의 다섯 마을이지만, 벌써 정오가 지났으니 두세 군데만 둘러보기로 했다. 친퀘테레 다섯 마을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몬테로소 알 마레에 먼저 가고, 라 스페치아로 돌아오면서 다른 마을을 둘러보면 시간을 아낄 수 있겠지? 이런 계획조차도 일단 기차에 타고서 가는 길에 생각해 낸 나.

 

 

 

 

 

#2

다른 사람들을 따라 몬테로소 알 마레 역에 내렸다. 간이역처럼 조그만 역사를 빠져나오니 푸른 바다를 길게 따라가는 좁은 해변과 헐벗은(?) 사람들이 보였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늘어져서 몸을 지지는 사람들과 시퍼런 바다에 풍덩풍덩 뛰어드는 또다른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엄청 덥고 따가운데 왠지 시원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저 코카시안들은 햇볕에 강하다고 해야 할까,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보기만 해도 뜨겁도록 반짝이는 모래 해변에 거침없이 널부러져 있는 게 여러 의미로 대단했다.

 

나는 십수 분만 저러고 있어도 온몸이 벌겋게 탈테니 일단은 시원한 에어컨과 밥을 찾아가기로 했다. 계획도 없는데 서치도 못하고 성격까지 급해서 괜찮은 식당 찾는 척 하다가 대충 눈에 띄는 오스테리아에 들어갔다. 해산물 파스타와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주문해 이탈리아에서의 혼밥에 도전했다. 파스타는 풍미가 좋았고 약간 매콤해서 한국인 입맛에 딱이었고 조개나 새우 같은 해산물도 맛이 개운했다. 차갑게 나온 와인을 곁들이니 엄청 출세한 어른이 된 것 같아 약간 우쭐하기도 했는데...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다. 갈증이 나서 급한 마음에 와인을 시키면서도 '한 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빙된 건 웬 유리병. 어쩐지 와인 한 잔 값 치고는 비싸더라... 그래도 내 주량에 맞춰 마시면 됐을텐데 일단 맛본 와인이 독하지 않았고 오히려 탄산음료 같아서 방심하고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이 비싼 와인을 남기고 가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컸고. 이게 실수였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느데 어랍쇼. 정신은 멀쩡한데 나도 모르게 갈지자로 걷고 있다...?

 

 

 

 

 

 

 

 

#3

엄청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원래 만취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핑핑 돌고 기운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데 기분 되게 나쁜 그런 기분... 아, 취했네 취했어. 와인이라고 우습게 본 내 잘못이었다. 무슨 와인을 포카리스웨트 마시듯 마시냐고.

 

몬테로소 알 마레 바닷가로 나와 산책로 난간에 기대보기도 하고 나무 그늘로 잠시 피해있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뜨거운 햇볕 때문에 혈관에 알콜만 더욱 쌩쌩 돌아갔다 시부럴. 하도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오는데 머리 속 저편에서는 '웃지 마, 심각해'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심각한 일 맞긴 하다. 유럽에서 대낮에 술에 취해 혼자 돌아다니는 아시안 여성이라니, 위험을 자초한 셈이었다.

 

결국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일단 몬테로소 알 마레에서는 철수하기로 했다. 딱 한 곳만 더 들르고 빨리 피렌체로 돌아가자며 기차역으로 가는데 문득 드는 생각. 그 홍콩 룸메랑 같이 올걸 그랬나? 이렇게 황당하게 몬테로소 알 마레 구경이 끝났다.

 

 

 

언젠가 다시 가고야 말겠어

 

 

#4

다음 마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제정신이 돌아왔다. 원래 빨리 취하고 빨리 깨는 게 특기(?)이긴 한데 위기감이 들어서인가, 이건 평소보다도 빠른데? 다행이긴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어휴, 네가 술꾼이냐? 술꾼이야?

 

라 스페치아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마을은 마나롤라. 막연하게 어감이 좋아서 골랐다. 유난히 언덕길이 많고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늘어선 마을이었다. 아직은 약간 멍한 상태였는데도 그 와중에 '이 동네, 색감이 좋네...'라고 감탄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하지도 않고, 소박한데 예뻐서 정감이 갔다. 가끔 눈에 띄는 작은 배, 건물 사이로 늘어선 전선과 빨래줄, 어딘지 조마조마해 보이는 얇은 발코니 난간 등등에서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 느껴져서 마냥 화려하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작고 아기자기한 어촌 마을이라, 그 많은 언덕길에도 불구하고 몬테로소 알 마레보다는 더 마음이 갔다.

 

 

 

 

 

 

 

몇 달 전 본 애니메이션 '루카'에 딱 이 풍경이 나와서 영화를 보면서 감탄했다. 저 풍경에 한 번 감탄하고 시원하면서 따뜻한 마나롤라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 애니메이션에 또 한 번 감탄하고...

 

 

 

 

 

 

 

 

 

 

 

어휴, 컨디션만 좋았어도

더 놀다 가는 건데 

 

 

 

 

 

 

 

 

 

 

 

 

 

 

 

#5

라 스페치아에서 피렌체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사고 기차를 기다렸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다녀온 몬테로소나 마나롤라와는 영 딴 판인 이 칙칙함... 도저히 같은 날 방문했던 곳들 같지가 않았다. 동화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가는 기분인데, 그런 기분이 여행지에서 들면 어떡하냐. 낡은 기차역 플랫폼에서 후덥지근한 더위를 견디며 기다린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돌아왔다.

 

피렌체에 도착하니 조금씩 해가 질 무렵이었다. 씩씩하게 시작한 친퀘테레 여행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실망감에,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는데도 제대로 된 저녁식사를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아무 거나 먹지, 뭐 하며 시뇨리아 광장 쪽 번화가로 가 보았다. 가는 길에 눈에 띈 해질 무렵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어느 가게에서 따끈한 파니니와 콜라를 사서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같은 방을 쓰는 한국인 언니와 마주쳐서 같이 돌아오는데, 숙소 코앞에서는 호스트를 만났다. 뭔가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떤 대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야기 끝에 호스트가 "오늘 더웠지? 내가 음료수 살게"라며 숙소 앞 슈퍼로 우리를 데려갔다. 이런 호스트는 처음이라 도리어 우리가 당황해서 사양했는데 기어코 슈퍼로 우리를 끌고 가서는 음료수를 고르라고 권했다. 룸메이트와는 다르게 나는 물건을 고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는데, 나도 모르게 턱을 괬다가 양팔을 휘둘렀다가 하며 고민했더니 그 제스처에 호스트와 슈퍼 아저씨 모두 빵 터졌다. 호스트가 너 정말 귀엽다고 웃는데 나를 볼 때마다 웃던 대학 시절 프랑스인 교수님이 떠올랐다. 뭘 물어볼 때마다 번쩍번쩍 팔을 드는 내가 웃긴다고 했는데, 어린 학생 같은 내 몸짓이 유럽 사람들 웃기는 데 뭐가 있긴 한가 봐ㅋ

 

 

 

 

 

 

 

 

친퀘테레 여행을 권했던 홍콩 룸메는 방에 없었다. 전날 좀 쌀쌀맞았던 것 같아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붙여보려고 했는데, 아쉽네.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가 씻고 잠들었다. 다음날 로마로 떠나는 기차를 놓치지 않고 타려면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