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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6 Roman Holiday

ep #4 로마 명소 벼락치기

 

 

한여름 피렌체는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여행자의 플래시몹 성지 같은 곳이었다. 유럽이나 북미에서 온 듯한 가족(아이가 열댓살 정도면 열에 일곱은 미국식 영어 발음이었다), 걸음은 느리지만 언제든지 돈 쓸 준비가 된 연로한 일본인 관광객, 카메라에만 돈을 쓴듯 생전 처음 보는 대포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중국인 등등... 그 다양한 타입의 여행자가 작열하는 7월 피렌체의 태양 아래에서 다같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모습이, 피렌체에서 본 가장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이탈리아에 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사람 구경 실컷 한 피렌체를 떠나 가볼곳 천지인 로마로 향했다.

 

같은 방의 한국인 언니와 기차 시간이 비슷해 함께 숙소를 나섰다. 친절한 호스트에게 직접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 사이 어디로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부엌에 메모를 쓰는데 옆에 서 있던 언니가 "와~ 영어 잘하네요? 그렇게 안 봤는데..."라며 감탄했다. 칭찬인 걸까 멕이는 걸까. 메모 옆에 열쇠를 놓고 나오는 길에 호스트와 딱 마주쳤다. 우리 간다고 인사했더니 너희는 정말 카인드하고 그레이트한 게스트였어, 잘 가, 그러더니 대뜸 나와 언니를 번갈아 안았다. 갑작스런 신체 접촉에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자연스러운 척, 유럽식 인사에 익숙한 척 같이 얼싸안았다. 숙소에 묵는 내내 나를 큐트 걸이라고 불렀던(내가 어디서 큐트 걸 소리를 들어보겠냐고) 호스트와 그의 숙소가 코로나 팬데믹을 어떻게 견뎠을지 문득 궁금하다.

 

한국인 룸메 언니와는 행선지가 같았지만 내가 좀더 일찍 출발하는 기차를 타서 언니와도 기차역에서 헤어졌다. 혼자 로마라니, 가슴이 두근두근하구만.

 

 

#1

로마는 여행을 결정한 그날부터 숙소를 고심해서 고른 곳이었다. 세계적인 관광 도시인만큼 선택지가 엄청나게 다양했고 숙소 형태, 위치, 가격 등등 고려할 것이 많아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선택지가 없으면 모를까, 기왕 많이 있으니 그 안에서 최선을 찾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 더구나 한정된 예산을 가능하면 아껴 쓰고픈 나 같은 사람이라면.

 

고민 끝에 고른 곳은 오타비아노 역 근처 어느 아파트였다. 코앞에 바티칸이 있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로마에서 안전하기로는 이곳만 한 데가 없을 것 같았다. 여행 전 직접 주고받은 메시지로 숙소 주인이 영어를 잘하고 제법 친절하다는 것까지 확인했으니, 한국어 블로그에 숙소 후기가 몇 없지만 도전 삼아 가 보기로 했다.

 

게다가 바티칸 근처라니, 세상 홀-리-하잖아.

 

 

오타비아노 역

 

 

숙소에서 나를 맞이한 사람은 어떤 아저씨. 호스트인 줄 알았는데 같은 아파트 다른 방에 묵고 있는 손님이었다. '이제 곧 가겠다'는 호스트를 기다리며 둘이 어색하게 주방에 있다가 말을 섞었다. 렛미인트로듀스마이셀프 각자의 국적을 확인하고(나는 대한민국, 아저씨는 체코) 또다시 찾아온 어색한 침묵에 질식할 뻔 했는데 대뜸 체코 아저씨가 "너 김정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었다. 그동안 나름 많은 외국인을 만났는데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북한 관련 질문을 여기서, 이 타이밍에, 이 분위기에 듣다니ㅋㅋㅋㅋㅋ 남한 사람과의 아이스 브레이킹용 소재가 북한 이야기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는데 이것도 벌써 6년 전 이야기니까, 이제는 다르겠지? 영화, 케이팝, 드라마... 할 말이 오죽 많겠냐고. 쭉 쓰다 보니 격세지감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비로소 만난 호스트의 이름은 마릴레나. 강한 이탈리아 억양과 친근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쓸 더블룸을 소개해 주며 로마에는 며칠이나 있냐고 묻는 마릴레나에게, "3일 밖에 못 있는다"고 했더니 맘마미아를 외치면서 휴가가 너무 짧지만 로마는 꼭 걸어서 여행하라고 추천했다. 걸어서 느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는 도시라고 거듭 강조, 또 강조.

 

안 그래도 걸을 생각인데, 햇볕이 너무 따갑다고 엄살 부리는 시늉을 했더니 '너의 흰 피부가 타겠지만 그래도 꼭 걸어봐야 해'라며 생각지도 못한 피부 이야기까지 하면서 셀프 워킹 투어를 추천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는 길에 로마 지하철에서 암내 폭탄을 맞고(와... 서양인들 암내 무엇... 코에 암내 스트레이트를 맞은 느낌) '두 번 다신 지하철 안 탄다'고 결심했던 지라 대중교통보다는 걸어서 다닐 생각이었지만 현지인이 이렇게까지 추천하니 이건 뭐 안 걸을 수가 없겠네.

 

 

 

오랜만에 쓰는 프라이빗 룸

 

 

#2

금강산도 식후경. 숙소 맞은편 작은 식당으로 쑥 들어갔다. 우리말로 하면 '점심 특선'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바깥에 서 있던 걸, 숙소 체크인 때부터 눈여겨 보고 있던 참이었다. "우노 뻬르소나!"(한 사람!)를 외치고 "논 카피스코 리딸리아노"라며 당당하게 이탈리아어로 이탈리아 말 못한다고, 영어를 써도 되냐고 물으니 인심 좋게 생긴 웨이트리스가 씩 웃어 보였다.

이탈리아 음식은 잘 모르니 대충 카프레제와 페투치네를 하나씩 시켰다. 카프레제는 맛있었는데 처음 먹어보는 페투치네는... 문화 체험했다고 생각하자. 맛 없진 않았는데 생소한 맛이라 '이게 맛있는 건가 아닌 건가' 아리송해졌다.

 

음식값은 23.5유로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25유로를 냈더니 웨이트리스가 2유로를 거슬러 주었다. 50센트 더 줬다고, 나 잔돈 없는데 하고 당황하니 영어를 못하는 웨이트리스는 웃으면서 손짓 발짓으로 서비스라고 생각하라고 대답했다. 관광의 도시 로마에서 영어 안 쓰고 이탈리아 말로 주문(?)한 덕이라고 생각하지 뭐. 기분 좋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웨이트리스에게 고마워 다시 이 식당에 갈 생각을 했는데 이상하게 식욕이 돋지 않아 남은 여행 중에 재차 이 식당에 갈 일이 없었다. 지금 찾아보니 이 식당을 폐업했네ㅠ 역시 감사한 마음은 제때,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ㅠ

 

 

 

 

 

#3

기분 좋게 길을 나섰다. 로마에 온 첫날이니 가장 유명한 곳, 가장 가보고 싶던 곳부터 발도장을 찍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지 않겠다던 결심을 두어 시간 만에 어기고 최대한 숨을 들이쉬지 않으며 간 곳은 콜로세움이었다.

 

이번 여행을 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로마를 떠올렸던 건 콜로세움 때문이었다. 왜인지는 나도 몰라. 전생에 콜로세움에 시즌권 끊어놓은 검투 덕후였는지도 모르지 뭐. 지금은 원형의 1/3 밖에 안 남았지만 조금만 공부를 하고(EBS 다큐 완전 추천) 폐허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상상력과 노력을 발휘하니 더없이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인 곳이었다. 화창한 파란 하늘과 붉은 돌이 조화로워 보였다.

 

 

 

 

 

 

 

 

 

 

#4

이때만 해도 포로 로마노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어서, 콜로세움 바로 옆에 있는데도 포로 로마노 입구에서 쿨하게 돌아섰다. 상세한 설명 없이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곳이라 그랬는데, 이런저런 책을 읽고난 지금도 전혀 아쉽지 않은 결정이다. 책을 읽고나니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아예 책으로 탐방하는 게 낫겠더라.

 

유적 대신 길가 풍경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돌이 깔린 도로와 세계 곳곳에서 모였을 게 틀림없는 콜로세움 근처의 인종 다양성이 포로 로마노보다 더 재미있었다.

 

 

 

포로 로마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5

영화 '로마 위드 러브'는 이곳 베네치아 광장 교통경찰의 수다로 시작한다. 우디 앨런 영화답게 정신없이 시작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찐 로마 교통 경찰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수다만큼이나 정신없는 자동차 릴레이...

 

 

 

근데 로마 도로 이상하다... 차선 표시가 없다(ㄷㄷ)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푸른 하늘, 베이지색 기념관 외벽, 흰색-초록색-붉은색 이탈리아 국기의 묘한 색 조합

 

 

 

 

 

#6

베네치아 광장에서 골목을 요리조리 걷다 보면 트레비 분수가 보인다. 조금 뜬금없이 여겨질 정도로 사방이 건물인 곳에 꽉 차듯 서 있다. 조각이 정말 정말 정말 멋있다. 꼭 볼 필요는 없지만 한 번쯤 봐서 나쁠 건 없을 멋진 조각상들. 조형적인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가치로는 나보나 광장의 분수들이 우위라고 들었지만 로마의 랜드마크로는 트레비 분수가 한 수 위다. 저 인구 밀도를 보라.

 

 

 

 

 

 

 

#7

로마의 또다른 중심지, 스파냐 광장. 주교황청 스페인 대사관이 이 광장 옆에 있어서 스파냐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름의 유래보다는 '로마의 휴일'로 더 잘 알려진 곳이지 않을까. 나라 이름에 어마어마한 브랜드 프리미엄을 거저 얻은 스페인이 위너라는 생각 밖에 안 든다.

 

 

 

 

 

가능하면 남의 얼굴 찍지 않으려고 하는데 사람이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아, 피할 수가 없다. 내 얼굴도 누군가의 사진에 찍혀 블로그 어딘가에 올라있을지도 모르지. 이 정도 명소에 왔다면 프라이버시는 포기하게 된다.

 

 

 

 

 

로마 셀프 워킹 투어는 이 정도로 하고, 숙소로 컴백. 분명히 재미있었는데 왜 기억이 안 나지.

조금은 별 일 없이 심심하게 지나간 하루였다.

 

 

 

여행기 쓰기가 조금씩 귀찮아져서 급하게 끝내는 거 맞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