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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6 Roman Holiday

ep #6 로마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

 

 

형제란 좀 복잡한 존재 같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나와 공유하는 평균 50퍼센트의 유전자만큼 심적으로 가깝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완전한 타인인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는 고민을 형제와는 나누어 본 적도, 나눌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마냥 데면데면한 사이는 아니다. 형제는 나의 어린 시절 추억과 가족사를 공유한다.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생각과 감정이 있어서 때로는 무척 가깝고 편하게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 역시 어린 시절을 통해 켜켜이 쌓여있어서 피에 근거한 유대감이 아무리 강해도 어떤 지점에서는 자석의 같은 극끼리 죽어라 밀어내고 맞지 않기도 한다. 며칠 씻지 않아 꼬질꼬질한 모습도 그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을만큼 서로를 의식하지 않지만, 밖에서 그가 맞고 오면 친히 가해자의 뚝배기를 깨주러 출동할(...) 사이. 친구만큼 가깝지는 않지만 친구 이상으로 끈끈한, 이상한 거리감이 나와 내 친형제 사이에 있다.

 

 

 

#1

그때껏 여러 번 해외에 다녀왔지만 한 번도 형제의 선물을 챙겨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이탈리아에서는 꼭 그에게 줄 것을 사겠다는 의무감이 의식의 기저에 깔려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의 쪼리를 훔쳐와서 빈손으로 돌아가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컸다고 할까. 그래서 쇼핑 거리로도 유명한 비아 델 코르소를 걸어가면서 부지런히 가게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취향을 몰라서 내가 무엇을 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한참 걷기만 했지만.

 

마침 세포라가 눈에 띄었다. 일찌감치 멋부리기에 눈을 뜬 형제라면 향수 선물을 무난하게 반길 것 같았다. 그나저나 한 번도 온 적 없는 세포라를 남자 혈육 때문에 오게 될 줄이야. 점원의 추천을 받아 내 여행 예산 중에서 형제에게 줄 만한 돌체 앤 가바나 향수를 골랐다.

향수를 현금으로 살 계획이 없었던 터라 신용카드로 결제하려고 했는데 핀 번호 오류가 자꾸 떴다. 여행 전 은행 직원은 따로 설정한 번호가 없으니까 앞뒤로 00을 붙이면 된댔는데, 여러 번의 해외 여행 중에 단 한 번도 은행원이나 카드사 상담원의 말이 맞았던 적은 없었다. 정확한 번호를 입력하는 데 세 번쯤 실패하자 계산대 점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너 진짜 이 카드 주인 맞아?' 같은. 이해한다, 유럽에 좀도둑이 좀 많냐고.

 

잠깐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근처 ATM에서 부랴부랴 현금을 뽑아왔다. 소소한 고생 끝에 산 향수는 다행히 형제의 마음에 들어 잠시나마 우리 사이의 무게추는 '안 싸움' 쪽으로 기울었다. 나중에 또 그에게 좋은 것을 사다 주어야겠다. 뭐 한 다섯 번쯤 여행하면 그 중에 한 번 정도...?

 

 

 

 

포폴로 광장과 포폴로 문, 비아 델 코르소까지 모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건축 프로젝트였다. 지금이야 교황은 오직 그리스도교의 수장으로서 가톨릭 신앙 세계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지는 역할에 충실하지만 1929년 라테라노 조약 이전까지 교황은 세속 군주이기도 했다. 세속 권력을 왕국 자체보다는 가톨릭 교리를 전파하고 강화하는 데 썼다는 점이 다른 유럽 군주들과는 다르지만. 포폴로 광장-문, 비아 델 코르소의 정비도 교황의 가톨릭 권위 강화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교황이 세속 군주였다는 걸 모르면 공화정의 역사를 가진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왜 이렇게까지 종교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로마를 여행한다는 건 서양사 자체를 탐구하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도 들고.

 

조금 딴소리지만 이런 이력을 알고 나면, '신정 이미지가 강한 이슬람을 기이하게 여기고 비판하는 서구 기독교 세계는 다르면 얼마나 다른지' 같은 회의적인 생각에 이르게 된다. 니들이 말하는 종교나 이성, 문명과 야만, 그게 대체 뭔데. 한국인이면서 서구중심주의의 세계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걸 이상으로 여겨온 나의 관념이 사뭇 낯설게 느껴진다.

 

 

 

#2

포폴로 광장 반대 방향으로 코르소 거리를 쭉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판테온. 고대 로마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되어 7세기 이후로는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었다. 여러 역사적인 인물들의 무덤이기도 하고, 돔의 구조적 신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여러 역사와 문화와 생각이 짬뽕된 곳이라 어쩐지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건축물들이 떠올랐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나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 같은 곳들이.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세우며 가까이 다가왔다. '드디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고 말았구나' 하며 긴장했는데 원피스를 입은 코카시안 여자가 내가 들고 있던 H&M 쇼핑백을 가리키며 "이 근처에 H&M이 있어? 어디서 옷 샀어?"라고 물었다. 옷이 하도 없어서 코르소에서 세일하는 옷을 하나 샀는데 이것 때문에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신선한 대화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라파엘로의 무덤 그리고 판테온의 제단

 

 

#3

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 책 몇 권을 읽었다. 이탈리아 예술에 관한 책이 주였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여행에서 직접 본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알아야 여행이 완성될 것 같았다.

그 중 '나보나 광장에서 베르니니와 만나다'를 가장 재미있고 인상깊게 읽었다. 로마에 발자취를 남긴 다섯 예술가의 작품과 생애를 편안하게 들려주는 책인데, 타이틀롤이기도 한 베르니니(와 라이벌 보로미니)의 이름을 알려주어서 기억 속 나보나 광장을 다시 둘러보게 해 준 점이 특히 좋았다. 눈으로 본 나보나 광장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지만 책으로 경험한 나보나 광장은 그곳에 남아있는 베르니니의 조각과 분수, 산타녜세 인 아고네 성당의 사연으로 그 아름다움이 더욱 깊고 진한 곳이었다.

 

 

 

 

또 가고 싶네

 

 

로마 2일차 이야기, 아직 안 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