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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6 Roman Holiday

ep #1 갑자기 떠나는 길



여행의 계기는 조금 갑작스러웠다. 그해 여름, 나를 좋게 평가한 분들의 제안으로 어떤 일을 이제 막 시작한 터였다.
나한테도 감히 휴가라는 게 있기는 할까, 어디로 떠날 수는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일에 빨리 적응할 궁리부터 하는 게 당연한 자세라는 생각에 휴가는 포기한 참이기도 했다.

어느날 점심식사 자리에서 휴가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이번 수다는 나에게도 휴가 계획을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일에 임하는 의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말이 '고도의 계산된 답변'으로 해석될 만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 이참에 유럽 다녀와 버려. 얼마나 쉬어도 되길래 유럽 이야기까지 나오나. 일주일도 괜찮다는 말에 바로 그날 밤부터 이틀을 꼬박 새서 비행기 표를 샀다. 언제 또 쉴지 모르니 과감하게 떠나버리라는 부추김에 금방 귀가 팔랑팔랑 날렸던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애송이였다(...).

휴가에서 돌아온 후 기다리고 있을 업무량을 모르고 그저 설레는 마음에 샀던 건 밀라노로 들어가서 로마로 나오는, 이탈리아행 표였다. 비행기 표를 살 당시 이탈리아의 강력한 경쟁자는 일본이었다. 교토에서 한창 열리고 있을 기온 마쓰리가 궁금했고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장소도 있었다. 그 무렵 읽은 책에도 영향을 받았고 특가 표에 홀려서 아무 감상 없이 다녀온 삿포로의 아쉬움도 컸다. 그보다 더 큰 이유도 있었다. 꽉 채운 8박 9일 휴가라든지 비행기 삯만으로도 비용 면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갖춘 일본 '여행의 값'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웠다'. 이탈리아에 가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데 그 나라를 어떻게 다녀?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어떻게 일주일을 버텨? 안 돼, 못 하겠다. 몇 년 전보다 영어도 더 자신있게 할 수 있고 여행 경험도 쌓였고 경제 사정도 나아졌고 심지어 능청스러운 면모까지 갖게 됐는데 대체 뭐가 무섭다는 건지, 일본행 표를 알아보며 스스로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왜 안 되냐고. 첫 여행 이후 하나씩 오답을 고친다는 마음으로 가고 싶었던 곳을 가면서 아쉬움을 지워가던 내가, 몇 년동안 계속 가고 싶어 애태우던 이탈리아와 로마를, 그냥 '못하겠어'라는 약한 소리에 눌려 포기한다는 게 말이 돼?

이탈리아행 비행기가 텅장의 두려움과 국제 미아의 공포를 이겼지만 온갖 걱정 때문에 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은 길이 막혀 도착 시간이 늦어지면서 이유 있는 불안이 되어갔다.

경유지인 홍콩에서도 영 못마땅한 일이 이어졌다. 밀라노행 비행기는 두 시간이나 연기되면서도 게이트 번호가 자꾸 바뀌어 짜증을 북돋웠다. 원래 예정된 게이트에서 정반대 방향 게이트로 바뀌어 열심히 걸어가면 그 사이에 원래 게이트로 정정되는 식이었다. 넓은 홍콩 공항을 쓸데없이 왔다갔다 하는 사이 비행기 출발 예정 시간이 또 지났다. 한 시간, 또 한 시간... 출발 연기를 알리는 방송이 반복해 나올수록 같은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산타 클로스처럼 인심 좋게 생긴 기장이 직접 게이트에 나와 출발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 마디로 태풍. 창 밖을 보니 그의 말대로 바깥에서는 바람이 붕붕 울고 번개와 천둥이 수시로 내리쳤다. 이 무렵 홍콩은 원래 태풍에 휩쓸리는 계절이라 뜻밖의 이유는 아니었지만 간만에 해외에 나와 쫄아있던 내게는 모든 것이 '뭔가 잘못된 여행'의 전조 같았다. 예정된 시간대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이 불안을 참아낼 힘이었는데, 집에서 나와 여기 홍콩에 이르기까지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홍콩에 내리치는 이 비바람이 문득 아주 뚜렷한 현실이 되었다.

일행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철저하게 혼자여서 마음을 달래줄 사람도, 자정을 훌쩍 넘겨 피곤해 의자에서 곯아 떨어져도 제때 비행기에 날 데리고 태워줄 사람도 없었다. 그 바람에 탑승 수속을 시작하겠다는 방송이 (드디어!)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뜬눈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나마 밀라노로 가는 비행기에서 센스있는 옆자리 파트너를 만난 덕에 편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랠 수 있는 여유를 벌 수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홍콩 비즈니스맨은 기내 엔터테인먼트 설정을 한국어로 바꾸는 나를 유심히 본 모양이었다. 말할 기운도 없이 피곤하고 굶주린 나를 대신해서 중국어(아니면 광동어?)로 말을 거는 스튜어디스에게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해준 걸 보면. 하긴 나도 도저히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콘텐츠만 열심히 봐 댔다. 식스틴이라든가 식스틴이라든지. 아저씨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내 송아지만 한 보라색 배낭을 내려주는 친절도 베풀었다. 늦어지는 공항 도착과 기약없이 연기되는 비행기가 이유 모를 불안만 키워가던 와중에 이 사람의 사소한 친절이 그 불안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주었다. 예상치 못한 것들이 늘 불안을 불러 일으키는 것만은 아니었다.


 

 

평소 눈여겨 본 커다란 배낭을 사고, 여행 중에 매일 메고 다닐 가방으로는 고등학교 시절 백팩을 챙겼다.

배낭이 둘이라 번거로울 것 같았는데, 짐을 적게 챙겨서 큰 배낭에 작은 배낭이 쏙 들어가서 도시 간 이동 중에 불편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꼭 필요한 것과 비싼 것을 따로 챙길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던걸.

 

저 두 가방 안에는,

 

화장품(토너,로션,선크림,팩트 등), 세면도구(칫솔,치약,샤워 세트), 최소한의 의약품(밴드,인공눈물,지사제,진통제,비타민,상처 연고), 신발(샌들,쪼리-5년 전부터 함께 여행했던 쪼리가 사라져서ㅠㅠ 혈육 쪼리 들고 튀었다), 옷(반팔T 2벌,단독&이너 민소매T 3벌,바지 2벌), 전자기기(아이폰,아이패드,애플 충전기,보조 배터리), 각종 티켓(항공권,기차표 둘,여권과 여행자 보험 사본 1장씩), 동전 지갑, 환전한 돈, 선글라스

 

를 챙겼다. 출국하는 날 입고 착용한 옷과 신발도 포함. 모든 짐을 정말 최소한으로 챙겼는데, 간혹 기초 화장품이나 샴푸가 모자라지는 않을까 걱정되어도 "현지에서 사면 된다!"는 말로 자문자답했다. 심지어 가이드북도 친구가 쥐어주다시피 한 분철한 가이드북도 가져갈까 말까 고민했다. 궁금하면 현지 관광 안내소에 가든지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면 되지라면서.

이탈리아말 못한다는 이유로 여행 자체를 주저했으면서 '모자라면 사면 된다,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없으면 없는 대로'라는 생각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ㅋㅋ 항상 쓰던 것들, 누리던 것들을 조금 포기해도 괜찮다는 이상한 확신과 기대가 들어 짐을 꾸리면서 즐거웠다.

 

그래도 약간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지. 여행 직전까지 읽지 못한 피렌체 예술 기행 책을 챙길까 하다가, 가뜩이나 짧은 여행에 책은 무슨 책, 책이 없어도 비행기 안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아 가방에 자물쇠를 달기 전에 과감히 짐에서 뺐다. 지금 생각하면 최고의 선택이다. 아이패드에 잔뜩 우겨넣어간 영상도 채 보지 못했으니...

 

두 가방 다 해서 무게는 달랑 7kg. 여행 일정에 큰 차이가 있지만 첫 유럽 배낭여행 때에 비해 짐이 무려 10kg나 가벼워졌다는 건 그만큼 여행에 따라오는 불안이 덜어졌다는 것이려나.

 

 

 

한자만 잔뜩인 보드를 어떻게 알아보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