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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 About Me/내킬 때 쓰는 일상

나의 노트북 (ft. 그리고 HP m27fw)



나에게는 10년째 쓰고 있는 노트북이 있다.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 샀던 것이다. 당시 쓰고 있던 삼성 노트북보다 훨씬 가볍고(2.15kg 대 1.18kg... 비교 불가다) 깔끔한 흰색 외관과 선명하다 못해 눈이 아픈 디스플레이 때문에 포장을 뜯자마자 돈 쓴 보람을 120%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 노트북이 내게 단순한 소모품 이상의 의미를 가진 데는 그것과 함께 한 10여년의 시간이 있었다.

이 작고 소중한 노트북을 백팩에 넣어 다녔던 매일 편도 두 시간의 통학길, 하루종일 이해 안 되는 논문을 붙잡고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서 한 자 한 자 피로 새기는 듯 과제를 썼던 도서관에서의 밤(머리에 기름칠해야 한다며 캔맥주 마시면서 썼던 과제의 기억...), 끊임없는 자기 의심에 빠져서 눈물을 흘려야 했던 대학원 이후의 시간... 그때마다 이 노트북이 내 피땀눈물과 함께 했기에 한낱 사물임을 알아도 '이 친구'라고 부르며 아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지난 주말은 나에게는 사소한 재앙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지난 주 금요일, 여느 때처럼 미드를 보려고 며칠 만에 노트북 전원을 켰는데 이 상태였다.

 

 


잠깐만 봐도 맨인블랙 플래시 체험 가능함. 왜 기억을 상실하는지 알겠더라니까.

분명히 마지막으로 썼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하필 이걸 늦은 오후에 알게 되어 서비스 센터에는 다음날에나 방문했다. 그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친절한 수리 기사는 흠 하나 없는 노트북의 관리 상태를 칭찬했지만 메인 보드를 들여다 보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나도 짐작하던 대로 패널에 문제가 있는데, 진짜 문제는 내 노트북이 너무 오래되어 교체 부품이 단종되었다는 거다. 설사 부품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리 비용이 35,6만원 정도 들 거라며, 이 정도 오래 썼으면 잘 쓴 편이니 이만 보내주라고 하더라.

미치겠네.

그냥 노트북 하나 고장난 거지 뭐, 올해로 10년째 썼으면 오래 썼다, 이제는 충전기에 연결해 두지 않고는 밖으로 들고 나가기도 힘들어졌으니 쓸 만큼 썼다며 노트북 교체를 염두에 두기는 했다.

다만 앞서 쓴 대로 이 노트북과 함께 한 긴 시간과 그만큼 켜켜이 쌓인 기억 때문에, 수리 기사의 '수리 불가' 판정이, 조금 과장하자면 '한 시대의 종언'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노트북에 의지했던 시간의 거의 대부분이, 그래도 뭔가를 향해 열심히 살았던 내 노력의 시간이라 더욱 이 노트북을 놓기 싫었다. 고생한 기억이 묻어있는 노트북을 모니터 고장을 이유로 교체하는 순간 그 시간과 완전히 작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외부 모니터에 연결해서는 쓸 수 있어요". 그 말에 노트북과 옛 기억에 조금 더 질척여 보기로 하고 모니터를 골랐다.

물건을 고르는 과정에서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저렴해 봐야 20만원을 전후하는 여러 모니터를 알아보면서, '여기에 50만원 정도만 얹으면 새 노트북 살 수 있는데'라며, 노트북 교체로 일을 벌릴 유혹이 여러 번 찾아왔다. 10여년이 지나는 사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고성능 노트북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된 지금 상황이 '좀더 질척이자'는 결정을 흔들었다. 내가 좋은 모니터를 쓰면, 내 노트북보다 더 오래된 자그마한 모니터를 쓰는 부모님께도 새 모니터를 사 드리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모니터 2대와 노트북을 지르기에는 너무 얇은 내 지갑...)도 선뜻 결제창까지 가는 걸 가로막았다.

하지만 아직 헤어질 결심이 서지 않았다.
솔직히, 큰 모니터를 써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지금은 휴대성 좋은 새 노트북을 들고 다닐 일도 없었다.

그리고 쌔끈한 모니터로 나 먹고 살 길 찾는 데 전념하면 되잖아,라고 합리화하면서 고민 끝에 고른 게 이 모니터였다.

 

일단 설치샷부터

 


내 노트북을 애지중지한 이유 중 하나가 선명하고 쨍한 색감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여서 같은 회사(LG)의 모니터를 우선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모니터 자체의 디자인은 HP가 압승이었다.
LG 모니터도 생김새가 나쁘진 않았는데 HP와 나란히 놓고 보니 너무... 가전 같다고 해야 하나.
A/S도 걱정되지만 옆 동네에 서비스 센터가 있었다. 접근성이 나쁘지 않았고, 지금까지 노트북 문제로 여러 번 LG 서비스 센터에 갔어도 단 한 번도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한 적이 없어서(오히려 IT 문외한인 내가 인터넷을 뒤져서 해결했다...) 중요한 건 '서비스 센터 갈 일이 없는 것' 자체에 있지 않겠냐 싶더라고. 내구성을 생각하니 솔직히 LG나 HP나 거기서 거기라는 판단이 들어 비교적 저렴한 HP를 -과감하게- 선택했다.

 



오늘 오전에 배송될 줄 알고 기다렸는데 배송 문자가 안 오길래 '월요일에 오겠구나' 하고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혹시나 싶어 현관 문을 열어보니 그 사이에 살포시 놓고 가셨넹.

구성품은 대충 이렇다. 전원, 스탠드, HDMI 케이블, DVI 케이블. 사진 다 찍었는데 글 쓰다가 다 날아갔네ㅠㅠ

 



스탠드 조립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매뉴얼 그림대로 따라했더니 뭐 한... 10초 걸렸나?
진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배치하고, 책상 뒤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었다.

이렇게 새 모니터와 함께 -'랩탑'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지만 여전히 소듕한- 내 10년 된 할미컴을 업그레이드(?)했다.
이 노트북이 정말로 언제 끝장날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인 보드에 연기가 피어오르며 완전히 뻑나가는 순간까지 아껴 써야지.
그리고 몇 년간 끊겼던 노력의 시간을 조금 더 이어 가 보자.

 


빠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