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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외출 #excursion

창덕궁의 가을과 겨울 #1

 

 

2022년 새해를 대비해 2021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창덕궁 후원 예매.

2019년 가을에 다녀온 후로 후원에 다시 가고 싶어 적당한 시기를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딱 1월 첫째 주 말에 눈이 내린다는 기상 예보가 떴다.

눈 내린 하얀 고궁을 보는 걸 '이번 겨울에 꼭 할 일'로 꼽아두고서도 정작 2021년 첫눈이 내린 날에는 후다닥 궁으로 달려가지 못한 걸 두고두고 아쉬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지.

 

정작 창덕궁을 다시 찾은 날에는 기대만큼 눈이 내리지 않았고 내가 본 것은 눈이 소복소복 쌓인 궁이 아니라 낙엽도 채 남지 않은 삭막한 풍경이었지만 3년 전 가을과 이 겨울의 풍경을 머리 속에서 비교하며 궁을 둘러보는 것도 고궁을 좀더 다양하게 살펴보는 방법이지 싶다.

 

대강 '이번보다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이 더 많을 거'라는 이야기.

 

 

 

'19. 10월 창덕궁 돈화문을 지나서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궁 깊숙이 들어가는 첫 풍경. 기분 좋게 서늘한 계절이라 다들 옷차림도 무겁지 않고 햇볕도 적당했다. 무엇보다 지금과 가장 큰 차이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거겠지.

 

이때가 마스크 없이 지낼 수 있던 마지막 가을임을 안 사람이 있을까. 이 계절에는 조금 더 부지런히 돌아다녔어야 했다.

 

 

 

 

 

인정전은 참... 정전 치고는 소박하다. 인정전이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전각이고 경복궁 근정전이 정면 5칸, 측면 5칸 2층 전각이라고 하니까 실제 규모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근정전에 비하면 권위는 그대로이되 위압감은 덜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왕이 아닌 나는 대강 그 정도 인상인데, 문득 궁금해졌다. 인정전의 이 소박함은 조선 왕조 군주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한 나라를 짊어진 부담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는 상징일까 아니면 권위적인 통치가 아닌 어진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까.

 

 

 

 

 

그냥 앞마당이 크지 않아서 작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돈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한참 들어와야 정전이 보인다는 것도 창덕궁의 특이점. 오롯이 창덕궁만 보였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조선 시대의 다른 고궁, 특히 경복궁과 이모저모 비교하게 되었다. 광화문역에서 나와서 육조대로와 광화문을 지나 쭉 직진하면 곧장 근정전이 나오는 경복궁을 떠올려 본다. 여러 번 굽이굽이 들어와야 정전이 있고 내전이 있는 궁이라니,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안락함이 느껴지지 않나 싶다. 생각할수록 조선 시대 왕들이 창덕궁을 편안하게 여겼다는 이야기가 이해되었다.

 

 

 

 

 

궐내각사 권역은 지근거리에서 왕을 보좌하던 관료들의 사무 공간. 전각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이곳이야말로 창덕궁의 생활감이 가장 잘 느껴지는 곳이다. 분주하게 서류나 서책을 나르고 업무를 보았을 궐의 사무직들도 퇴근 시간과 월급날을 기다렸으려나.

 

 

 

 

 

인정전과 궐내각사를 둘러보고 내전으로 건너가 본다.

 

 

 

희정당 뒤 대조전

 

 

입구에서 목을 쭉 빼고 들여다 보니 서온돌에 놓인 침대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20세기 초까지 실제 왕과 왕비가 살았던 곳이니 서양식 입식 문화가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지만 - 그리고 반드시 좌식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 고궁에서 침대를 보는 건 다시 봐도 영 낯선 풍경이다.

 

근데 대조전 사진은 찍어놓고 희정당 사진은 어디다 팔아먹었다냐.

 

 

 

 

 

대조전 전각들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신발을 계속 벗고 신을 필요 없이 돌아다니기 좋았겠네...

 

 

 

낙선재

 

 

창덕궁에는 유독 사대부의 집을 본따 만든 전각들이 많다....고 해 봐야 두 곳, 낙선재 그리고 후원의 연경당 뿐이지만. 만인지상이 굳이 신하들의 집을 모방한 건물을 지은 이유는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계승인가, 단순한 선비 흉내인가. 의문이 생기지만 헌종이 사랑했던 후궁 경빈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지은 곳이라는 내력을 떠올리면 왕의 사치보다는 인간적인 면모가 배어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석복헌

 

 

헌종이 주로 머문 낙선재와 경빈의 처소 석복헌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다. 어지간히도 가까이 지내고 싶었나 본데. 손이 귀해진 당대 왕실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헌종은 경빈을 맞아들인 지 불과 2년 뒤에 자식 없이 승하했고 정조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증조 할아버지의 로맨스만큼 절절했을까 궁금한 동시에 행복했던 시간이 너무 짧아 안타깝다는 점도 닮아있어 묘하다.

 

 

 

 

 

낙선재와 근처 동궁까지 돌고 보면 후원 입장 시간이 가까워진다.

슬슬 후원에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