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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 About Me/내킬 때 쓰는 일상

220902 라면과 치킨이 지겨워졌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처서가 지나고 기적처럼 더위가 꺾이면서 내게는 두 손님이 찾아왔다. 비염과 식욕. 비염은 확실히 반갑지 않은 손님인데 후자는 반가운 건지 아닌지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쨌든 식욕이 생기면서 배달앱을 들여다 보는 빈도가 잦아졌다. 슬프게도 내가 배달앱 VIP가 되는 일은 없었다. 번번이 아이쇼핑(?)에 그쳤던 건 순전히 배달비에 대한 억울함 때문이다. 식당에 배달기사들이 전속 고용되어 그 덕에 음식 배달비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고 살았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스타트업이었던 배달 플랫폼 기업들이 요식업계를 좌지우지하는 큰손이 된 지금도 난 배달에 서비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걸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 너무 옛날 사람 같나.

포장 주문도 방법이지만 이건 에너지 효율이 별로다. '개인 용기를 들고 직접 가게까지 걸어가서 포장해 오면 환경 보호도 되고 운동도 되지'라며 가끔 음식을 포장해 오기도 하지만, 긍정의 셀프 세뇌도 한두 번이면 약발이 떨어진다. 걸으면 '이렇게까지 해서 이걸 꼭 먹어야 하나'는 회의감에 빠지게 되고 자전거 대여는 배달비에 맞먹는 수준으로 돈을 쓰게 되니 의미가 없다. 장롱 면허라서 차를 몰고 가는 옵션은 애초에 있지도 않지만 운전을 할 수 있어도 배달비 삼천원 아끼겠다고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에 기름 써가면서 친히 가게까지 행차하는 것도 코미디다.

무엇보다 요즘 배달음식... 다들 가격이 미쳤다.
남은 건 결국 우리집 냉장고 털어먹기 밖에 없다. 그리고 다행히 나에게는 유튜브가 있지.

가족의 주말 농장에서 수확한 채소가 가득했다. 깻잎, 오이, 가지, 치커리, 상추 등등... 우리끼리는 감당이 안 되어서 식당을 하는 친척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쌓였다. 어떻게든 다 먹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 엄마와 나는 입맛이 천지 차이로 달라서, 엄마가 그것들로 만든 토속적인 반찬을 내가 먼저 손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이 채소를 돈 안 쓰고 내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만들어내려면 결국 내가 움직여야 했다. 저것들로 내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만들지? 그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뭐지? 배달앱을 쓰지 않고 냉장고를 파서 제대로 차려 먹어 보려던 욕심은 뜻하지 않게 상상력을 자극하고 나 자신을 통찰하게 했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시작된 나 혼자만의 냉장고 파먹기 챌린지. 튀김을 좋아해서 깻잎도 가지도 튀기고, 애매하게 남아있는 당면을 불려서 김말이까지 만들었다. 엄마의 팬트리에서 쌀나방 서식지가 될 뻔 했던 메밀면과 소면을 구출해 비빔국수도 만들었다. 잔치국수는 대체 몇 번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지난 설에 받은 참치캔도 바빌론의 탑마냥 쌓여있어서 김치참치찌개에 볶음밥에, 가능한 상상할 수 있는 조합이란 조합은 총동원해서 요리했다. 그 사이 엄마가 양배추를 사다놓았길래 유통기한을 살짝 넘긴 마요네즈를 탈탈 털어 코울슬로를 만들어 실컷 퍼먹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오늘 오후였다. 너무 배고파서 뭘 요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선택지가 라면 뿐이어서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려는데, 찬장 문을 열고도 라면을 집기까지 한 5초 걸렸다. 나도 모르게 라면 앞에서 '이걸 진짜 끓여, 말아?' 하고 주저주저하는 내 모습이 하도 낯설어서 그 순간만큼은 유체 이탈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겨우 라면을 먹고난 후에는 '뭔가 쓰레기 같은 걸 먹었다'는 불쾌함이 맴돌았다. 그리고 저녁에는 가족이 교촌치킨을 사 왔는데, 웬걸 이것도 예의상 서너 조각 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수도 있는 건가...?

겨우 일주일 밖에 안 되는 시간동안, 겨우 음식처럼 보이게 뭘 만드는 것까지만 가능한 내 똥손으로 직접 요리해 먹은 것들이 라면과 치킨을 지겹다고 느끼게... 한 건가? 이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서 오늘 내가 라면과 치킨에 식욕이 돋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자기 전에 생각해 보다가 냉장고 문을 열고 닫던 시간을 떠올렸다. 양배추 한 통을 멀거니 보면서 맛있게 먹을 방법을 궁리하던 것, 어떤 재료들을 조합해야 괜찮은 음식을 만들 수 있을지를 생각했던 게 귀찮기는커녕 재미있던 게 기억났다. 입에 먹을것이 들어가기까지 요리 시간은 제법 걸렸지만 그런 번거로움은 잊히고 머리를 굴리던 그때의 재미만 남았다. 나는 이런 사람인가 싶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들과 라면, 치킨을 등가 교환할래야 할 수가 없는 사람. 이것 외에는 별다른 이유를 댈 수가 없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한 음식들 다 맛있었다.

 

 

 

(먹을거 맞음) 정말... 비주얼은 별로지만 하나같이 존맛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