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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 About Me/내킬 때 쓰는 일상

200715_2020 미니멀 라이프: 책 버리기


울적해질 때면 방을 청소하는 건 나의 오랜 습관이다.


원래 주변이 지저분하거나 쓸모없는 물건이 여기저기 숨어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편이지만

재작년부터 '내 방 짐을 캐리어 하나에 담고도 충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부쩍 강해져서 의식적으로 자잘한 물건을 치워나갔다.

그래도 일년에 두세 번씩 하는 대청소를 해야 '비움'다운 비움을 해 낼 수 있긴 하다.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보며 '저걸 언제 치우나' 하는 찜찜함,

거꾸로 물건에게도 자신의 가치를 백퍼센트 발휘할 기회를 빼앗는 것 같은 미안함을 느끼는 게 딱 질색이다.

정리할 때마다 내가 가진 물건은 쭉쭉 줄어갔지만 그만큼의 단정함과 깔끔함 덕분에 물건이 빈 자리는 늘 만족스럽다.


정말 필요하고 추억하고 싶은 물건만 남겨두는 것, 내게는 불필요하지만 누군가의 손에서는 빛날 물건에게 제 가치를 되찾아주는 것이 내 스트레스 해소용(?) 청소의 핵심이다. 남아있는 것들을 얼마나 단정하게 정리하는가는 이차적인 문제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곳이 책장이다.

지적 허영심에 사기만 하고 읽지 않는 책, 딱 한 번 즐겁게 읽고 그저 곱게 꽂아둘 뿐인 책을 볼 때마다

항상 제출 마감 직전까지 숙제를 미루고 미루는 불안을 느낀다.


문제는 내가 그런 스릴을 감당하기에는 마음이 넉넉치 못하다는 것.

당장 읽어야 하는 텍스트가 얼마나 많은데 저것들은 언제 다 읽어...



그래서 마음 먹고 책장을 정리했다.

오랫동안 꽂아두기만 했거나 오래도록 소장할만큼의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던 책들 중 상태가 좋은 것들은 따로 추려서 알라딘과 예스24에 중고로 팔았다.


 


ㅁ 누군가는 나르샤의 '삐리빠빠'가 세상을 앞서간(지금도 세상이 따라잡지 못한) 노래라고 했지만 나는 노래 공개 때 팍 꽂혀서 앨범까지 샀다. 유감스럽게도 수록곡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앨범 소장에도 미련이 없어졌다.


ㅁ FLEX 프랑스어 문제집은 하도 오래 전에 산 책이라 '중' 품질이겠거니 하고 보냈는데 '상'을 받았다. 오죽 공부를 안 했으면 새 책 취급을 받겠냐고ㅋㅋㅋ



 


ㅁ 한창 영어 소설 읽기에 빠져있을 때 샀던 The Sense of an ending. 첫 페이지부터 어려워서 덮고 쭉 묵혀두었던 책이다. 영화로 나왔길래 극장에 가서 봤는데 보다가 졸았다. 너무 지루해. 드라마틱하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산 소설이지만 소설을 잘 극화했다는 영화가 그 모양이면 소설은... 책 사기 전에 영화가 먼저 나오지 그랬어. 500원 밖에 못 받는다니.


ㅁ 영화 '달팽이 식당'을 보고 국내에 번역된 소설을 사서 읽었다. 영화는 소설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긴 수준이어서 소설만의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주연 배우에 대한 팬심 하나로 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팬심만으로 소장하기에는 정말 딱 한 번 읽고 그대로 꽂아두기만 한 책이라서 미련 없이 팔았다.



 


ㅁ 해리 포터 원서는 한창 해리 포터에 미쳐있던 어린 시절 부모님을 졸라 샀다. 고등학생 때는 성적은 떨어지는데 해리 포터만 주구장창 읽어대니 아빠가 내 눈앞에서 해리 포터 책을 박박 찢는 일도 있었다. 책을 찢는 행위 자체가 충격적이라 아직도 그 기억은 남아있다. 그래도 영어로 된 책은 안 건드리더라고. 줄거리야 뭐 달달 외우다시피 하고 있고 영어도 고등학생 정도 되니 원서는 술술 읽혀서 가지고 있을 만 했다. 지금은 해리 포터를 졸업할 나이여서 원서도 돈 받고 팔 수 있을 때 팔았다. 



 


ㅁ 후배의 추천으로 '7년의 밤'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후 때마침 출간된 정유정 작가의 신간이 '종의 기원'이었다. '7년의 밤' 같은 역동적인 스릴을 기대하며 읽었지만, 재미있기는 해도 '7년의 밤' 같지는 않았다. 나오자마자 샀으니 작가 사인이 들어간 초판인데 이것도 그냥 중고 서점으로 보냈다. 




ㅁ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 위력을 절감했던 건 글쓰기 실력이었다. 단답형이나 객관식 문제로만 학생을 평가하지 않는 대학에서는 자기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구사하는 글쓰기 실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다못해 교수님한테 이메일을 보내는 것조차도. 하지만 대학 필수교양 글쓰기 강의에서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정도만 가르치더라고...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어떻게 글을 써야 잘 쓸 수 있을까 독학하려고 산 게 '글쓰기의 전략'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나는 저 책을 통달하는 데는 실패했다.


 

 


ㅁ 그리고 나처럼 책 사두고 공부 안 하는 아빠의 기타 독학 교재... 생각보다 값을 쳐 주길래 주인 허락을 받아서 냉큼 알라딘에 보낼 택배상자에 포장했다.



 


ㅁ 오랫동안 추억 상자에 재워둔 영화 DVD와 음악 CD들도 하나씩 꺼내서 보냈다. 2007,8년쯤 젊은 일본 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도장깨기하면서 웬만한 영화는 거의 보았는데, 미야자키 아오이의 '첫사랑'은 어디서도 파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정식 발매된 DVD 구입. 저 영화는 좀 별로였다.



 


ㅁ 오스카 페터슨의 Side by side는 딱 한 곡, 'Why think about tomorrow?' 때문에 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곡이다. 오아시스의 데뷔 앨범은, 킨(Keane) 때문에 영국 밴드에 취미를 붙여갈 때 오아시스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들리길래 호기심에 샀다. She's Electric이랑 Don't look back in anger, Wonderwall만 건진 걸 보면 난 파워 대중 취향인가 보다...



 


ㅁ 린지 로한은 Speak과 A little more personal 두 앨범 모두 가지고 있다. 10대 때는 할리우드에 완전 미쳐서ㅋㅋㅋ 의외로 두 앨범 다 괜찮은 팝락 곡으로 꽉 차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통째로 들어도 좋다. 어릴 때 즐겨 듣던 앨범이라 그런지 듣다 보면 노스탤지어도 느끼게 되고ㅋ 제이슨 므라즈 앨범은 잘 관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웬 매입 불가야... 종이 케이스 앨범인데 운송 중에 살짝 찢기거나 한 듯 하다. 좀더 꼼꼼히 포장할걸.





ㅁ '미래를 여는 생각'은 의외로(?) 철학이 아니라 경제학 책이다. 그것도 경제학 자체라기보다는 유명한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요약해서 실어둔 책. 경제사 좀 알아보려고 샀다가 한 번도 안 펴 봐서 팔았다. 경제 공부하겠다면서 펑펑 돈 써서 책 사놓고는 겨우 900원에 중고로 팔아버리는 모순이라니. 근데 왜 900원 밖에 안 하지? 진짜 재미없는 책이라 애초에 많이 팔렸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리고 버릴 책들




중고로 팔 수도 없고, 워낙 오래되어 변색이 심하거나 곰팡이가 슬어버린 책이 대다수라 좋은 뜻으로 기부할 수도 없다. 혈육이 공부했던 구 토익 문제집도 한가득이라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폐지행이다. 어릴 때 읽었던 책('검은말 뷰티' 같은 거...)도 있지만 책 내용이 내 어린 시절을 만든 것이니 책 자체에 대해서는 일말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버리기로 했다.




사흘에 걸쳐 틈틈이 책장을 정리하며 든 단상을 적자면,



1. 책장을 비운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돈 들여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고 꽂아둔 책들은 그 자체로 나의 소유욕과 지적 허영심을 보여준다.

저 책장에 꽂은 책들에 쓰인 지식이 전부 내 머리 속에 있다면 난 지금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내 책장을 볼 때마다 자조했다. 책장이 빽빽할수록 - 특히 어려운 책이나 외국어 책이 많을수록 - 지식을 갖지 못한 내 열등감이 선명해졌고, 그럼에도 부지런히 지식을 채우지 않는 게으른 내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럴 바에는 책장을 깨끗이 비우고 부족한 지식을 인정하는 떳떳하고 겸허한 사람이 되는 게 훨씬 낫다.


 

2. 책 선물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생각보다 주위에 아무 생각없이 책을 많이 선물했더라고. 당시에는 나름의 이유로 선물할 책을 골랐지만, 돌이켜보니 내가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선물한다는 게 굉장히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에게 권할 만한 아이디어와 가치가 그 책에 있는지 내가 직접 확인하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지인들에게 의미없는 종이 뭉치를 안긴 건 아닌지 뒤늦게 걱정되었다.


나에게도 단지 '선물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읽지도 치우지도 못하는 책이 쌓여있다. 친구들에게 같은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다. 앞으로 내가 읽지 않고, 감동하지 않은 책을 선물하는 일은 없을 거다.



3. 책을 꼭 소유해야 하는 걸까?


책장을 비워갈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일이 있었다. 한 번 읽고 감흥을 느끼기는 했지만 계속 소장할지 버릴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책들을 분류하는 일이었다.

계속 가지고 있기에는 처음 읽었을 때만큼의 충격과 감동을 주지는 못할 것 같고, 미련 없이 버리기에는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감상한 것 같지 않았다. 대부분이 책 설명만 보고 충동적으로 산 인문학 서적이거나 끝까지 읽지 않은 소설이었다.


고민 끝에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본 후 결정하기로 하고 남겨두었지만, 또다른 숙제가 생긴 것 같아 약간 무거운 마음이다. 결국 다 읽어봐야 책장을 비울 수 있을테니까.

어쩌면 책장의 빈 공간과 내 머리 속 지식의 양이 정비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소유해야 하고 또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책에 담긴 지식이지, 책이라는 지식의 그릇이 아니니까.


기껏 내 오랜 책들을 사 준(?) 서점과 책이 팔려야 살아갈 수 있는 출판사 직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앞으로는 웬만하면 책을 빌려 읽고, 오래도록 가까이 두고 읽으며 종종 되새기고 싶은 지식이 담겼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책을 사기로 했다. 마침 도서관이 집에서 가까우니 잘 됐다.



그런 의미로 도서관에서 바로 빌려온 책 소개




코로나 시국이라 우리 시 도서관은 전부 예약대출제로 운영되고 있다. 도서관 이용이 조금 불편해졌지만, 찬찬히 책을 고르고 이런저런 평을 찾아보며 내가 찾던 책인지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집에 꽂아둔 유럽 예술서와 정치 관련 책을 조금 더 잘 이해해 보려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통사를 빌렸고, 여행 가고 싶은 마음도 달랠 겸 '나의 로망, 로마'를 골랐다. '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는 예전에 편하게 읽은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의 저자가 쓴 새 책이다.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을 읽으며 책 속 정보가 좀 얕고 문체도 약간 유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도 사학자가 쓴 것도 아니고, 대중 교양서로는 도리어 장점이 될 수 있는 문체여서 나쁘지 않은 책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책의 후속작이 나온 셈이라 길게 고민하지 않고 빌렸다. 처음부터 어려운 책 읽어서 뭐 하겠어.


'일본인 이야기 1'은 올해 2월에 진작 읽었던 책이다. 처음 접했을 때는 영토와 국내에 한정되어 있던 역사 인식이 깨지는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던 책이라, 그동안 살까 말까 고민했다. 조금 더 신중해지고 싶어서 다시 한 번 가져왔는데, 빌리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두 챕터를 내리 읽었다. 후속작 빨리 나왔으면. 세트로 소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