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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 About Me/내킬 때 쓰는 일상

비싼 생일선물, 2월 (ft. 당근)

 

해가 바뀌면서 한 살 더 먹었다. 한국식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셀프 축하 말고는 생일을 기념하는 걸 안 좋아해서 정작 생일 당일부터 이틀 뒤까지 쭉 불쾌해져 있었는데 뜻밖에도 혈육이 생일선물이라며, 노트북을 사라고 거금을 쾌척했다.

받은 만큼 돌려줄 자신도 없고 '내 노트북은 아직 멀쩡해'를 스스로 세뇌하다시피 외고 있던 터라 한 번 거절하는 시늉은 했는데, 뭐 결국에는 그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노트북 구입 지원금을 받았지만 필요한 차액은 내가 내는 거라 어떻게든 싸게 사려고 했다.

진작 맥북 에어를 점찍어두어서 여러 창구를 알아보았지만 정가로 사야 하는 공홈이나 애플스토어는 도저히 무리였고, 공인 리셀러도 할인 폭이 거기서 거기여서 큰 차이는 없었다.

가끔 쿠팡에서 엄청나게 할인한다고도 하는데 타임딜이 언제 뜰 줄 알고 하루종일 폰만 들여다 보고 있겠어.

그나마 간혹 중고 거래에서 미개봉 신품을 저렴한 값에 건질 수 있다는 걸 소니 헤드폰 구입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맥북 구입에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여러 후보를 올려두고 저울질하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더라고... 찜해둔 물건을 혹시라도 누가 먼저 사갈까봐 마음 졸이는 게 당근에서 인기 매물을 사려는 사람의 필연적인 고통 아니겠냐며.

얼마나 고생했냐면 머리 속에 agony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ㅋㅋㅋㅋㅋ 게다가 마침 지마켓 빅세일과 11번가 십일절이 예고되어 있던 때라 당근-공인 리셀러를 오가는 저울질은 하루종일, 며칠간 이어졌다. 거기에 맥북 색상도 채 결정하지 못해서 고통(?)을 삼중으로 겪고 있었는데

 

 

 

두둥.

 

전날 마음에 들어 찜해둔 맥북 판매글이 사라져서 '떼잉 또 놓쳤네' 하고 상심해 있었는데 바로 다음날 오전에 똑같은 판매글이 올라와 있었다. 동일 판매자의 글인 걸 보니 어설픈 개인 거래는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바로 구입을 문의했다. 채팅으로 알아내기에는 쿠팡에서 직접 결제하고 주문한 건 맞는데, 당근에 올려 차액을 챙기는 식으로 소소하게 용돈벌이를 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서 색상 때문에 고민한다고 하자(원래는 미드나이트에 마음이 기울었다) 판매자가 먼저 만원을 깎아주기까지 했다. 오픈마켓 세일과 비교해도 이 정도 가격에 사기는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어 바로 거래를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 직접 판매자를 만나 받아온 맥북.

최신 노트북이기만 하다면 뭐든 안 좋겠냐마는 하필 맥북이었던 건 맥OS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태어나서 지금까지 윈도우만 썼으면 이제 다른 OS도 궁금할 법 하잖아. 더 나이 들어 머리든 습관이든 뻣뻣하게 굳기 전에 다른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걸로 밥 벌어먹는 사람은 아니니까 에어 기본형으로.

 

 

 

...라고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도 맥북이 나와 정말 잘 맞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진짜 새 노트북이 필요한가 싶어서 '이 돈으로 그냥 전기자전거를 살까' 고민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며칠 내로 나도 이걸 당근에 올리게 될 가능성을 감안해 포장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남들 다 옆으로 뜯는 비닐을 나만 상자 사이 빈틈을 따라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오려냄ㅋ 그래야 맥북 포장 상자도 색이 덜 바랠테니까... 나 같은 맥북 언박싱은 없을 거야.

 

 

 

조심조심 포장지까지 벗겨냈다. 사과가 영롱하다.

하판에 환풍구가 없어서 놀랐다. 맥북 에어에 팬 자체가 없어 하판에도 환풍구가 필요치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봐도 놀랍네.

팬 없어도 노트북이... 괜찮을 수 있다고? 뭐 이런 생각.

 

 

 

어버버 하는 사이에 '안녕하세요'를 놓쳤다ㅠㅠ

 

개인 세팅까지 마치고 이것저것 만져보는데 단축키며 마우스 패드 동작이며 뭐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어서 어려웠다.

신세계를 기꺼이 탐험하겠다며 내돈내산한 컴인데도 막상 내 것이 되니 맥OS의 구동 매커니즘을 알아간다는 건 영 귀찮고 번거로운 선택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 같은 마음으로 맥북을 골랐다면 박수를 쳐 줬겠지만...

 

그래서 한 이틀간은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두기만 하고 30분 정도 만져봤나...? 나 데려왔으니 이제 어쩔 거야, 하고 비싼 몸이신 맥북이 책상 위에서 은근하게 압박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동안은 맥북이랑 눈도 안 마주치려 노력했다ㅋㅋㅋㅋㅋ

 

결국 한낱 사물이 내 상전 된 느낌이 너무 싫었던 나는 구입 닷새 정도가 지난 후에야 각 잡고 맥북을 만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딱히 잘 다루는 편은 아니지만 애플 공홈에 올라온 맥북 단축키 모음과 도서관에서 빌려온 맥OS 기본서에 의지해 처음 맥북을 샀을 때보다는 한결 편해졌다.

맥북과 맥OS 모두 쓸수록 조금씩 나를 놀라게 하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트랙패드의 직관성과 감도가 특히 놀랍다. 간단한 손 동작 몇 개로도 거의 모든 마우스 동작이 "아주 편안하게" 가능하다. 트랙패드의 감도도 좋아서 손에 쫙쫙 붙는 느낌이고.

이래서 다들 애플 트랙패드X2 하는구나...?

 

노트북을 바꿨다고 일상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사실 뭔가 달라졌다고 느끼려면 아이패드를 사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적어도 생기를 불어넣어주기는 했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소비였다. 그리고 남들보다는 싸게 산 편이잖아. 판매자가 키보드에 건전지도 넣어줬고.

 

 

+ 또다른 당근

 

새 노트북이 좋긴 하지만 13인치 화면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 논문 쓰던 시절에 13인치 화면을 들여다 보며 시력 떨어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27인치 모니터를 들이고서 개안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까 도저히 맥북이라도 13인치 화면까지 기분좋게 품기는 어렵겠더라고.

다만 모니터와 연결해 놓고 쓰려면 맥북의 키보드나 트랙패드까지 같이 쓰기는 어려우니 블루투스 키보드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당근을 막 뒤지다 보니 누군가 매직 키보드 1세대(애플 와이어리스 A1314)를 만오천원에 내놓았더라. 이거 당근 시세가 4만원인데...!

 

사진으로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 보여서 바로 딜을 넣었고 거래가 결정되자마자 날아가듯 찾아가서 냉큼 주워왔다. 이건 득템 맞지?!

 

 

 

키보드는 손때도 거의 안 타고 키감도 신제품과 다르지 않아서 가히 S급 물건이었는데 그래도 몇 년간 사람 손을 탄 흔적이 있어서 키보드 사이사이로 먼지가 붙어 조금 지저분했다.

좋은 물건을 싸게 샀으니 이 정도는 내 노동으로 커버하는 셈 치고 알콜스왑, 면봉, 극세사 타올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그 덕에 지금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깨끗하다ㅋㅋ

 

당근 아주 좋아... 생일 선물을 받은 것 치고는 내 날품을 꽤 많이 팔아야 했지만ㅋㅋ 비싼 선물을 기분좋게 얻었다. 내 맥 월드 셋업에 도움 준 혈육과 모든 당근 판매자에게 감사 드리며,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