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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번쩍.

 

간만에 혼자 방을 썼는데도 여행 중이어서 그런가, 눈이 번쩍 저절로 뜨였다.

전날 밤에 미드를 보다가 잤는데... 노트북은 저절로 꺼진 지 오래였다.

 

방 안은 아직 깜깜했다. 몇 시지, 아이폰도 어디 있는지 손에 잡히지 않아 시간을 알 수가 없다.

꾸물꾸물 침대에서 기어 나와 두꺼운 창문 커튼부터 열어 젖혔더니.


 

이런 풍경이.


아침 7시였는데, 아직 푸르스름하다. 

전날 이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캄캄해서 바깥 풍경이 어떤지도 모르고 잤는데, 여기가 산 코앞이었구나.

압도적인 크기의 산이 눈앞에 떡 하니 있으니 비몽사몽 간에도 넋을 놓고 봤다.

난 뭔가 대단한 걸 보면 왜 이리 웃음이 나는지 몰라.


소복소복 눈이 쌓인 정경도 차분하니 좋다. 추운데 창문 닫기가 아쉬울 정도야.



조금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또 산.

키 큰 침엽수가 빼죽빼죽 눈을 맞고서 서 있는 걸 보니 꼭 검은 초콜릿 덩어리에 하얀 설탕 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다.


한참을 뒷산 구경, 마을 구경을 하다가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심심해서 방 안 TV를 틀었는데 위성 TV였다. 못 알아듣는 독일어 채널은 건너뛰다가 그나마 낯 익은 얼굴이 나오는 채널을 켰다. 안녕 미스터 오바마. 의회에서 뭔가 열심히 연설하긴 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아저씨 얼굴 보니 은근히 반갑네요.


나름대로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미적미적했다 달팽이인가. 머리까지 말리고 보니 8시쯤 되어서 갈아입은 옷만 대충 트렁크에 던져놓고 지갑이랑 아이폰만 들고 나왔다. 오늘은 낮에 다시 빈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날 건너온 것처럼 배도 타고, 기차도 타고, 이동하는 데만도 시간이 걸리니 그 전에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환한 아침의 할슈타트도 감상할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아침 산책.

 



조식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쯤 여유가 있었다. 그루너 앙거의 호스트 부부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달가닥달가닥 소리가 나는 주방을 지나쳐서 밖으로 나가 호수 쪽으로 걸었다. 가다가 이런 시내도 보고. 어두울 때는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 밖에 안 났는데, 아침에 보니 뭔가 차분해지는 모습이다.


 


똑같이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밤과는 달리 할슈타트의 아침은 상쾌했다.

천천히 마을 중심부로 향한다.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창에 비친 호수도 왠지 낭만적이고.


 

산책 도중 만난 멍멍이


나름 이르다면 이른 아침이었는데, 밤과는 달리 마을 길가에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아침부터 호숫가에 나온 관광객이 대부분이었지만,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몇몇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점 앞을 지나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할머니 두 분에게 웃으며 "그뤼스곳"이라고 먼저 용감하게 인사해 보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외국인인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살짝 얼굴이 굳었던 두 분도 웃는 얼굴로 "그뤼스곳"이라며 인사해 주었다. 어찌나 훈훈한지. 공항에서 빈으로 들어오는 기차 안에서 E씨에게 독일어 인사를 물어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수많은 순간 중 하나였다.


이에 다시 용기를 냈다. 검은 개와 아침 산책을 하던 아주머니를 불러 세우고는 강아지가 너무 예쁜데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영어와 약간의 손짓 발짓으로 내 말을 이해한 아주머니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는데... 강아지 허락도 받았어야 했다ㅋㅋㅋ 이것이 어찌나 도도한지 아주머니가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내가 애가 타서 쩔쩔매니 아주머니가 두어 번 더 강아지 이름을 불러주었는데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쪽을 봐 주었다. 아주머니가 한 번 쓰다듬어 볼래,라고 했는데 개털 알레르기가 있어 머리에 살짝 손만 얹고 말았다. 하, 너무 귀여운데... 귀여운데 만질 수가 없네ㅠㅠ


호숫가에서 한국인 관광객 아주머니를 만나 사진을 부탁했다. 엄마에게 보내드릴 거라고 하니 나름 정성껏 찍어 주셨는데, 역광이라 그다지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울 엄마 그 사진 보고 좋아하셨으니 됐지 뭐.


간단히 산책을 마치고 그루너 앙거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했다. 펜션에 나 혼자인 줄 알았더니 간밤에 마을에서 보았던 대만인 가족과 커플도 여기 묵는다. 그 틈에서 혼자, 하지만 맛있게 아침식사를 마쳤다. 조식이 어찌나 깔끔하고 양도 많고 맛있는지.


다시 기차를 타러 갈 시간이 되어 캐리어를 들고 내려왔다. 시간이 맞지 않아 호스트 아저씨의 차를 얻어 타는 대신 직접 캐리어를 들고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아마 시간이 맞았어도 다시 걸어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환한 할슈타트를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던 터라, 이렇게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땀이 삐질삐질. 길은 여전히 눈이 덜 녹아 더럽고, 캐리어는 젖을까 걱정되는데 무겁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사진도 찍고 길도 구경하면서 선착장을 향해 걷는데, 그런 내 모습이 너무 버거워 보였나 보다. 그루너 앙거의 조식 자리에서 마주쳤던 대만인 커플이 지나가면서 "You're so brave, girl!"이라며 응원(?)을 건네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워서 놀라기도 했지만 혼자 하는 여행에서 여지껏 그런 응원은 받아본 적이 없어서 내심 기뻤다. "Thank you!"라고 인사하니 그들도 웃어 보였다.

 

 

선착장에서 바라본 할슈타트.



 

아침 햇살이 어찌나 눈부신지.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페리 안에서.


선착장에 캐리어를 세워 놓고 한참 마을을 돌아봤다. 

선착장 앞 교회도 예쁘고, 눈 덮인 산도 예쁘고, 푸른 공기조차 예쁘고.

다시 올 수 있으려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겨울 할슈타트에 올 수 있어 행운이었다. 그때가 아니면 다른 관광객들에 치여서 제대로 이 차분함을 즐길 수나 있었을까. 가족과 함께 다시 오고 싶긴 하지만, 다시 온다 해도 겨울에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할슈타트에 온 그대로, 다시 아트낭푸하임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빈에 돌아왔다. 이날 밤은 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이 다음날 저녁에는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돌아갈 예정이었기에, 움밧 나슈마르크트에 급히 체크인을 하고 짐을 내려놓고 거리로 나왔다.


웬만한 명소에는 다 갔다 온 터라 사실 더 둘러볼 곳은 없었지만 급한 마음에 일단 뛰쳐나오기부터 했다. 새로 체크인한 방에는 이미 여자 둘이 곤히 자고 있어 뭘 더 할 수도 없었고. 어딜 갈까 하다가 시티맵투고를 켜고 제체시온을 검색해 보았더니 걸어서 갈 만한 거리였다. 제체시온을 추천했던 베아트리스도 생각나서, 천천히 걸어서 가 보았다. 호스텔에서 엄청 가깝던데?! 5분 정도 걸었을까. 교통권 괜히 샀나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흑.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예술의 자유를.  


세기말 클림트, 콜로먼 모저, 오토 바그너 등을 위시해 빈 예술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예술을 통해 전달하고, 후원자가 아닌 예술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술 세계를 펼쳐 나가고자 하는 열망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빈 분리파라 칭했고, 그 의지의 일환으로 새로운 예술의 전당, 제체시온을 지었다. 제체시온 입구 높이 새겨진 저 문구에는 새 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염원하는 당대의 젊은 예술가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제체시온에서는 여러 전시가 꾸준히 열리고 있지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건물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지하 전실의 벽화, [베토벤 프리즈]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입장료 4.5유로를 내고 조심조심 지하로 내려가 좁은 입구를 지나니 [베토벤 프리즈]가 보였다.



 

Source : Bild (c) APA/ ROLAND SCHLAGER


실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 눈으로만 그림을 담기에 바빴다. 마침 안에는 경비원 한 명과 다른 관광객 두어 명만 있어서, 마음껏 여유롭게 전실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벽화를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그림에 대해 무지했다.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전문적이거나 철학적인 감상은 어렵고, 다만 직관적으로 그림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벽화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꽤나 벅찼다고 할 수 밖에.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의 4악장 [환희의 송가]를 리하르트 바그너가 해석한 것을 토대로, 클림트가 이미지화하여 총 다섯 파트의 벽화로 완성한 것이 [베토벤 프리즈]인데, 각 파트에 인간의 고통과 고뇌, 예술을 통한 극복 그리고 사랑과 환희의 감정을 그려냈다.


아마 이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은 마지막, '세상을 향한 키스'일 것이다. 두 남녀가 서로 얼싸안고 키스를 나누는 모습이 클림트의 또다른 명작 [키스]의 구도와 흡사해 이미지만으로도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기 쉽지 않으려나. 하지만 앞서 클림트보다는 쉴레에 더 마음을 빼앗겼던 나답게, [베토벤 프리즈]에서도 인상 깊게 본 그림은 이것이었다. 

 

 

 


[베토벤 프리즈]의 두 번째 파트, '약한 자의 고난'. 이 그림에서는 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세 남녀가 마치 구원을 애원하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토벤 프리즈]를 샅샅이 보았지만, 유독 이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날 아침부터 나는 좀 감상에 젖어 있던 것 같다. 간만에 할슈타트처럼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날 따라 더욱 내 안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여러 고민을 안고 있었다. 이전 학기에 겪었던 좌절이나 자신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견한 이기적인 나의 모습, 새로 시작할 학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 눈앞으로 다가온 대학원 최대의 과제 논문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걱정 등등. 원래 이 나이에, 이 시기에는 이렇게 힘든 걸까 싶을 정도로 고민거리가 많았다. 한 명의 사람, 여자로서의 고민도 나름대로 컸고.


이 여행은 그에 대한 일종의 돌파구로서 선택한 시간이었다. 뭔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까라면서. 그만큼 재충전의 시간이 절실했고 누구라도 또는 무엇이라도 이 슬럼프를 극복할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나 스스로가 되어도 상관없었지만 뭔가에 기대고픈 마음도 있었는데, 이날은 할슈타트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서 그 마음이 점점 고조되고 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그 나약한 순간에 한숨 고르고 찾은 건물에서 이런 그림을 보았으니... 누군가에게 구원을 비는 무릎 꿇은 저 세 사람의 모습에 나를 깊이 투영했던 모양이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참, 그렇다. 아무리 뛰어난 그림, 차트 넘버원을 기록한 음악이라도 결국 나의 마음을 가장 제대로 후벼판 것이 '나의 명작'이 되는 것 아닐까. 뛰어난 예술일수록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 미묘한 틈을 정확히 잡아내는 능력과 감성이 탁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어쨌든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 소리 내어서 울지는 못하고, 조용히 눈물만 훔쳤다. 근데 또 울다 보니까 감정이 북받치잖아. 흡흡, 하고 울다가 겨우 감정을 추슬러서 전실을 빠져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을 돌아봤지만 폐관 시간도 가까워지고 해서, 나와야지. 




제체시온에서 나오니 벌써 완연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 유명한 카페 무제움.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럴 기분 아니야. 걷고 싶어.


 


이번 여행, 마지막으로 보게 될 밤의 알베르티나.




케른트너 거리로 걸어가 한 피자집에서 마르게리타를 먹었다. 전부터 들어가 보고 싶었던 곳인데 이제야 가 보네.

주문하는 법을 몰라서 주춤주춤 하고 있으려니 피자 만드는 아저씨가 다가왔다.

이 피자는 뭐고 저 피자는 뭐라고, 일일이 설명해 주는 피자맨.

친절도 하셔라. 피자는 좀 짰지만.

 

 

 


방에 돌아오니 맞은편 침대에서 자고 있던 여자들이 일어나 있었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어도 금발머리인 걸 보고 아, 서양 사람이구나 알아채긴 했는데 얼굴을 보니 둘 다 미인이다. 팔다리도 길쭉길쭉해서 무슨 모델이세요, 물어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전날 룸메이트들과의 소통 불가 씬이 떠올라 관뒀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고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후아아, 하고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고 조금 더 나이 든 여자가 피식 웃었다. 고개를 돌려 같이 웃어 보였더니 어디 갔다 왔어? 우린 트렁크가 있는 걸 보긴 했는데 그게 네 꺼였구나라고 말을 걸어왔다.

 

"네, 제체시온에 다녀왔어요."

"거긴 왜?"

"베토벤 프리즈를 보려고요. 오늘이 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 밤 거리도 좀 걷고."

"혼자?"

"네."

"안 무서웠어?"

"그다지... 무서울 이유가 있나요?"

 

네 질문을 더 이해 못하겠다는 식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니 이 아주머니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 보았다.

 

"넌 이렇게 쬐그마한데... (기분 나빠해야 하나?ㅋㅋㅋ댁들이 큰 거예요) 스키니하고... 설마 혼자 여행 왔니?"

"네. 한국에서 왔어요."

"아. 우린 폴란드에서 왔어."

"가깝겠네요? (쭉 물어보고 싶었던 걸 물어보자) 두 분이 친구예요?"

"어?! 아니, 얘는 내 딸이야."

 

순진한 질문에 아주머니(라기보다는 내 쪽에서는 언니 정도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가 빵 터졌다. 화장실을 오가던 젊은 여자도 킥킥 웃었다. 자매, 적어도 나이 차이 나는 사촌 자매 정도 되겠거니 했는데 엄마랑 딸이라고? 내가 더 놀라서 "Oh, I see the resemblance... but I thought you two were sisters, at best"라고 솔직히 말하니 아주머니가 젊게 봐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몇 살이냐고 묻더니 내 나이를 듣고는 자기 딸과 또래라고 한다. 딸 뻘인 애가 혼자서 유럽에 왔다고 하니 무섭지 않아, 왜 혼자 왔냐고 재차 물었다.

 

백이면 백, 다 그랬다. 혼자 왔다고 하면 무섭지 않아? 외롭지 않아? (그리고 나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고는) 너 이렇게 쁘띠한데...라며 살짝 빈정 상하게끔 걱정해 주었다. 아마 혼자 돌아다니는 나를 기분 나빠지지 않게 한 건 이날 아침, 그 대만 커플 뿐이었을 것이다.

 

"혼자 오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오스트리아 정도면 안전하죠. 혼자 오면 좋은 점도 있고요."

"어떤 거?"

 

어떤 게 있지? 막상 대답하려니 조금 생각을 가다듬어야 했다.

 

"글쎄... 우린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잖아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인 건 좋은 일이지만 전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으로서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려면, 저한테는 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런 거요. 혼자 다니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제 모습들을 봐요. 그런 것들이 저를 더 풍요롭게(enrich) 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는 이렇게 조리있게 말하지 않았다ㅋㅋㅋㅋㅋ

 

약간 횡설수설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거니 해서 여행을 다니면서 줄곧 느꼈던 내 감상을 이야기했다.

 

정말로 그러했다. 이런 여행이 아니라면 오늘처럼 깊은 감상에 빠져서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내가 볼 수 있었을까.

온화하게 감싸는 듯한 그 그림을 보아도, 빈의 밤 거리를 쏘다니며 찬바람에 언 몸을 녹일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젖어들 충분한 시간 없이는, 이날 베토벤 프리즈 앞에서의 것과 같은 경험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내 대답에 납득하지 못한 듯 했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도 혼자 오다니 용감하네. 아시아처럼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더 그래."

"그게 뭐 별 건가요."

 

그럭저럭 상냥한 이 폴리쉬 모녀가 바에 내려가서 칵테일이라도 한 잔 하자고 했지만 나름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평소 같았으면 예쓰! 오늘도 놀아보자~하고 당장 따라 나섰겠지만, 그날은 피곤하기도 했고, 누구와도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쉽고 서운하고 벅찬 기분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빈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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