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느긋하게 생 미셸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눈에 익은 노트르담 성당이 보여 가까이 다가갔더니 성당 앞 광장은 벌써 관광객들로 가득 찬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한동안 성당 탑을 올려다 봤다. 희한하게 반갑네요잉.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 지베르 젠느에 들어갔다. 전부터 꼭 갖고 싶던 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누가 나에게 너의 인생을 바꾼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없이 [나무를 심는 사람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을 외칠 것이다. 학부 시절 문학 수업에서 교재로 만난 이 책은, 스스로 고독 속으로 걸어들어가 꾸준함만으로 세상을 바꾼 노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를 다 읽어냈을 때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했던 기억이 난다.
누구나 삶의 목표가 있고 야망이 있을 터이다.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내 경우에는 공부나 일에서 '보람'을 가장 먼저 찾고자 하고, 그 보람으로 삶을 쌓아올리기를 원한다. 나의 조그만 노력으로 누군가의 삶이 나아지고, 내 재능(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으로 사람들이 즐겁게 웃을 수 있다면 일이 고되더라도 나 역시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똑똑하지도, 유머 감각이 넘치지도 않으니 나에게 세상을 바꿀 비범하고 천재적인 면모를 기대하기란 우스울 뿐이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그런 나에게 재능 없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해준 유일한 책이었다. 비록 그게 수십 년의 고된 노동으로 일군 결과이기는 하지만. 하루하루 쌓인 행동의 결과가 화사한 햇살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프로방스라면 누군들 엘제아르 부피에의 인생에서 용기와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인품이 낳은 아름다움이라니, 누군들 반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그 책의 원서를 곡 갖고 싶었다. 이미 원문을 읽기는 했어도 책을 소장함으로써 그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단순히 말해 그냥 물욕이지 뭐. 이왕 온 김에 [시작은 키스]도 보고 싶었고. 단지 라데팡스에 있는 것처럼 친근감이 없는 서점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산다면 그건 꼭 여기, 생 미셸이어야 한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
지베르 젠느도 대형 체인이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서점 특유의 냄새가 났다. 빳빳한 종이와, 이미 누군가의 손길을 탄 부드러운 종이 결이 기분 좋게 어우러진 옛날 느낌의 냄새다. 한국에서는 언제 맡아봤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생 미셸과 루브르 뒤쪽 서점 모두 향기가 고고하고 정겹다.
한참 책을 찾았지만 도무지 장 지오노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점원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어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금방 책을 찾아주는 걸 보면 내 불어 발음이 아주 안 좋은 건 아닌 모양이다, 허허. 우리 아빠는 내 불어를 듣고 독일어 연습하냐고 했었는데 흑흑. 이렇게 영어 아닌 외국어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으니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파리 사람들이 좀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 4권을 집어들으니 대충 40유로를 내야 했다. 파리에서 화장품이나 옷이 아니라 책을 사다니... 지적 허영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학생 동네에서 학생다운 사치를 부린 덕에 마음이 풍족해졌다.
젊은애들이 와인 들고 널부러져 있던 그 여름밤의 퐁데자르가 생각나네.
다리를 건너 아치형 입구를 지나면 그 유명한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를 볼 수 있다.
3년 전 처음 파리에 왔을 때 루브르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루브르는 모나리자보다, 피라미드를 빙 둘러싼 건물 외곽에 붙은
파리 지성인들의 조각상으로 더욱 잘 기억되는 곳이다.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아도 그 조각상들의 얼굴은 다시 볼 계획이었다.
Musée d’Orsay
지베르 젠느에서 나온 이후 내내 걸어서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잠깐 널부러져 있었다.
빈에 비하면 파리는 따뜻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긴 해도 이 정도면 장갑도 필요 없겠다.
...아무래도 빈에서 장갑을 너무 늦게 산 것 같다. 흑흑.
겨울 여행이라 한국에서부터 핫팩을 잔뜩 챙겨왔다. 하지만 빈에서 하던 것처럼 온 몸에 핫팩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려니 파리에서는 조금 걸었는데도 땀이 난다. 오르세 앞 데크에 앉아 서점에서 산 책을 뒤적이는데 센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지금이 정말 겨울인가? 마치 봄바람 같다.
센 강의 키오스크를 지나 루브르와 오르세까지 지나쳐 차도로 걷다 보니 프랑스 국회의사당 앞까지 왔다.
저멀리 보이는 알렉상드르 3세교와 그랑 팔레.
그냥 지나치려다 호기심이 동해 그랑 팔레에 들어가려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다 휙 돌아서서 정신없이 걸었다. 파리의 유명한 사인단 집시 소녀들이 무리 지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거든. "Non" 한 마디로 쉽게 물리친 적도 있지만 그거야 3년 전에 일행과 함께 다닐 때나 가능한 얘기고, 나는 지금 백팩에 책 봉투를 들고 혼자 걷는 중 아닌가. 위험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니 차라리 그랑 팔레를 포기하고 말란다.
그랑 팔레 쪽으로는 가지도 못하고 콩코드를 지나쳐 계속 걷다 보니 헐벗은 가로수들이 죽 늘어선 길이 나왔다. 미니 공원 같기도 하고. 머리 속 지도로 대충 가늠해 보니 계속 걷다 보면 에펠탑이 나올 것 같아 계속 걸어서 가 볼까 했는데, 역시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게 발목을 잡았다. 걸을수록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결국 이 근처에서 샹젤리제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워낙 조그만 번화가에 카페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던 빈에 있다가 파리에 오니 무슨 시골 촌놈이 서울 구경하는 것 같다. 파리도 관광지가 한데 몰려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계속 걸어서 다니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고, 잠깐 쉬었다 갈 만한 카페는 왜 이리 눈에 띄지를 않는지. 파리에서는 함부로 아이폰 꺼내지 말라는 금기 아닌 금기를 어기고 시티맵투고를 켜고 카페를 찾았다.
네... 이번에도 답은 스타벅스였습니다.
빈에서도 갈 데 없는 어린 양을 잠시 쉴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신 곳은 스타벅스였는데, 파리에서도 그렇다. 샹젤리제 뒤쪽 골목에 잘도 숨어있는 스타벅스. 엄청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런 거대 체인이 있다는 게 길 잃은 양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이탈리아에는 스타벅스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 로마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계획도 없는 로마 여행을 벌써 걱정하고 있다.
잠시 앉아서 쉬다가 버스를 타고 오페라에 내렸다. 생각지도 않게 비니를 사고(솔직히 왜 샀는지 모르겠어. 가게에선 예뻐 보였는데ㅋㅋㅋ정줄을 놓으면 이렇게 충동 구매도 하게 됩니다. 조심하세요) 루브르 히볼리 가에 접어 들었다. 앙젤리나에서 파는 몽블랑이 그렇게 맛있다는 소문을 들었지 뭐요. 가게 앞에는 길게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관광객도 대다수인 듯 했지만 내 앞뒤로는 불어를 쓰는 가벼운 차림의 노인들이 서 있었다. 파리지앵들에게도 사랑 받는 곳인가봐.
조금 시간을 들여 기다려서 실내로 들어가니 앉을 자리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대로 진열대로 다가가 몽블랑 하나를 포장해서 나왔다. 숙소에서 느긋하게 먹어야지.
히볼리 가 앞을 널찍하게 차지하고 있는 튈르리 공원.
튈르리처럼 심플하면서 눈을 확 사로잡는 공원이 있을까. 이 공원이 특별히 아름답다는 말은 아니다. 고요한 공원에 원형 분수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유명한 사람들의 조각상이 있는 것 뿐인데.
이 공원이 파리 여행자에게 중요한 이유는 내가 지금 파리 어딘가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공간화된 이정표라는 점이다.
여기서는 바로 앞에 거대한 오벨리스크와 에펠탑이 보이고, 콩코드 광장을 지나면 바로 샹젤리제 거리에 들어설 수 있다. 양쪽 언덕길을 오르면 오랑주리 미술관과 죄드폼 사진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고, 공원을 가로지르면 루브르 히볼리 가에 들어가서 금방이라도 오페라나 루브르로 걸어갈 수 있다.
튈르리에서 뻬땅끄(Pétanque)를 즐기는 파리 사람들.
돈 걸었나? 내기하면 더 재밌는데ㅋㅋㅋ
하지만 파리 명소가 어쩌고 저쨌든, 이렇게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것이 훨씬 흥미롭고 정겨웠다. 생 미셸 사람들과 나눈 짧은 대화(책이나, 좋아하는 작가나, 날씨나, 여행 이야기)가 훨씬 마음에 스며들었고, 카페 점원의 퉁명스러운 배려가 꽤 신선했으며 스타벅스 안에서 파리 젊은이들이 나누는 속삭임이 듣기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공원에서 뻬땅끄를 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각상보다도 더 먼저 눈에 들어왔고. 방향만 가늠하며 발로 자근자근, 파리의 명소들을 잇는 길을 걸으면서 본 사람들의 모습은 머리 속 지도를 더욱 선명하게 그려줬다. 생 미셸이나 루브르처럼 익숙한 곳과, 오르세처럼 이름은 알아도 여전히 낯선 곳에 골고루 묻혀있던 기억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 도시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꽤 알면서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다.
파리와 다시 친해지기는 이 정도로 하고, 5시쯤 되어서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동행하기로 한 사람도 만나봐야 하고 몽블랑도 먹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날은 생각보다 일찍, 많이 지쳐버렸다. 푹 자야지. 앞으로 4,5일을 더 머물 도시인데 하루빨리 친해지길, 익숙해지길.
샹젤리제 한복판에서 본 'ㅎ'
이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ㅋㅋㅋ이번 여행에선 참... 내 나라와 자주 마주쳤네.
오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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