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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8 제주일주(濟州一周)

[제주일주(濟州一周)] #하룻날



약 일주간의 제주일주 시작

공항버스에서 내리니 비행기 탑승 한 시간 전이었다. 아슬아슬했네.

 

 



신경써서 계획한 여행 치고는 출발부터 실수했다. 기껏 택시까지 불러서 공항버스 첫 차를 탔는데 이거 왜 인천공항행 버스인 거야. 멍하니 카드를 찍자마자 눈치챈 게 다행이었다. 한 정거장 겨우 가서 내리고 김포공항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탔다. 버스값 만원 날리고 시간 잡아먹고 쯧.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어.


 

만원 날려서 놀란 마음 오천원짜리 커피로 달랜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동안, 매년 11월 첫째 주를 전후해 스쿠터를 타고 제주도를 여행했다. 2016년과 2018년은 일주일, 2017년은 이틀 일정이었다.

당시 일터에서는 매년 여름부터 겨울 초입까지 주요 사업 두세 개를 연달아 진행했다. 하나하나 진 빠지는 프로젝트였지만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초 단위로 업무 진도를 확인하면서도 극한의 효율과 완벽을 동시에 요구하는 성미 급한 상사와, 업무에 무지한 타 부서 직원의 무조건적인 비협조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 하고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짜증을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억누르는 동안 일에 대한 관심과 사명감이 같이 깎여갔다. 일과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시기, 마음의 보릿고개...였다.

시도때도 없이 솟구치는 분노를 용케 억눌렀는데도, 내가 보낸 서류에 물어볼 게 있다며 자잘한 질문을 열 개쯤 달아온 타 부서 직원의 전화를 받으며 비틀리는 내 윗 입술을 상사가 본 모양이었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좀 쉬다 오라며 휴가를 권하더라고. 이게 바로 이 뭐 같은 일터의 유일한 장점이자 열 받는 부분이다. 사람을 한계 직전까지 몰아놓고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휴가를 권하고, 돌아오면 다시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아니 뭐, 이런 이야기는 지금 할 필요 없고. 아무튼 죽지 않을 정도로 굴리고 쉬게 하는 그런 곳, 그런 상사였다.

나도 많이 약아져서 그 위선을 선선히 나 좋을 대로 쓰기로 했다. 상사의 권유를 매번 받아들여 주말까지 끼고 일주일씩 쉬곤 했고, 그때마다 선택한 휴식처는 제주였다. 그냥 숨통이 트이려면 제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매번 제주로 갔다.

2018년은 제주도 스쿠터 여행의 세 번째 해이자 (지금까지)마지막 해다. 늦어도 한참 늦게 쓰는 이 여행기는 그 세 번째 제주 여행을 기록하는 글이다.


 



아침 비행기 덕에 오전 9시도 채 되지 않아 제주에 도착해 공항 근처 스쿠터 대여샵까지 쓱 직행했다. 세 번째 스쿠터 여행이자 두 번째 제주 스쿠터 일주의 첫날은 언제나 그렇듯이 제주 북서쪽 해안도로를 끼고 달려 모슬포까지 내려가는 일정이었다.


 



제주 공항에서 차나 스쿠터를 빌려 해안도로를 달릴 계획이라면 보통 제주 북서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섬을 한 바퀴 도는 동선을 추천한다. 바로 오른쪽으로 바다가 펼쳐져서 내내 멋진 풍광에 면한 채 달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 해안도로 자체의 통행량도 많지 않아서 천천히 제주 도로에 적응할 여유를 갖기에도 좋다. 운전이 서툰 사람들일수록 추천. 그래도 여전히, 늘 조심해서 달릴 것.


 



애월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면 오른쪽으로 탁 트인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둑어둑한 새벽에 집을 떠나 제주 공항에 오기까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부 모노톤이었는데, 푸른색, 검은색, 녹색이 어우러진 바다를 보니 시야가 컬러풀해진다. 동시에 몸에도 활력이 도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는 다른 곳에도 있지만 검은 현무암과 바로 만나는 파란 바다는 이곳 제주에만 있다. 검은 현무암과 푸른 바다를 한눈에 담으며 여행을 시작하는 일은 나만의 루틴이 되었다. 이 루틴 자체가 이제는 제주로의 여행 통행증을 발급받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언제쯤 그 통행증을 갱신하러 갈지 모르겠네.





내가 빌린 스쿠터는 언제나처럼 50cc, 자전거 타냐고 놀려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작다. 그런 스쿠터를 타고 해안을 따라 위아래와 안팎으로 굽이굽이 구부러지는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회전목마를 탄 것마냥 두둥실하고 몸이 길을 따라 오르내린다. 전망 좋은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내가 제주도에 온 건지 놀이공원에 와 있는 건지 헷갈리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역시 애월해안도로 추천. 자동차로는 이런 기분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자전거는 노동이고.


 



내 장난감 같은 스쿠터로는 빨리 달릴 수가 없다. 최고 속력 50km/h, 남들에게 방해되지 않으면서도 내가 안심하고 달릴 수 있는 최고 속력은 45km/h. 조심해서 슬슬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가까워져 밥부터 챙기기로 했다. 제주 여행 첫 식당은 '인생밥집'.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진 이 식당은 제주 스쿠터 여행책에서 찾았지 아마.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나름의 원칙을 만들었다. 첫째, 하루 한 끼 정도는 돈 걱정하지 말고 그럴 듯하게 많이 먹기. 둘째, 제주 카페 곳곳에서 하루 한 잔씩 커피 맛보기. 음식의 맛과 커피의 향으로 여행을 기억하는 것도 괜찮은 추억 남기기가 될 것 같아서 미리 갈 만한 식당을 몇 군데 찍어놓았다. 첫날 점심식사를 한림에 있는 이 해물볶음밥 식당에서 들기로 한 이유다.


 

이제는 일하고 싶어요...



식당은 조금 오래된 양옥을 식당으로 깔끔하게 개조한 곳이었는데, 장판을 마루로 바꾸거나 한 것 말고는 거의 손대지 않았는지 손님들이 식사하는 공간도 방 배치 그대로인 듯 해서 식당이 아니라 친구 집에 밥 먹으러 놀러간 기분이 들었다.


 

가격은 친구네 집밥만큼 소소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밥값이 17,000원으로 오른 듯

 

 


탄수화물이 안 들어가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 몸뚱이가 됐다니 참나,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다음 갈 곳을 검색해 보는 사이에 식사가 나왔다. 간장 베이스로 볶은 밥이었던 것 같은데 아슬아슬하게 짜지않을 정도로만 간이 맞았다. 볶음밥 치고도 기름이 조금 많이 돌았는데 지금은 나아졌으려나? 비주얼은 인스타그램용으로는 합격이었는데 맛도 인스타그램용이었다. 작심하고 먹은 첫 끼 치고는 허탈하네. 미역국과 밑반찬이 밥보다 맛있어서 국을 잘 먹지 않는 나도 끝까지 다 마셔서 배를 채웠다.










식사를 마치고 한숨 돌리는 사이에 찾아둔 다음 루트. 오늘 최종 목적지인 모슬포까지 내려가는 길에 제주 서쪽에서 둘러볼 만한 곳들을 들르기로 했다.


밥 먹었으니 이제 커피 마시러 고고.















한림 앤트러사이트



본격 출발 전에 커피 한 잔.



한림항은 조용하고 평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같은 어촌 마을이어도 모슬포가 삭풍이 부는 황량한 이미지라면 한림에서는 초록 들과 밭이 좀더 눈에 띄었다. 화창한 하늘에 커피까지 어우러져서, 여행 첫날의 들뜬 기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카페에서 나와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서쪽 방향으로 난 길에서 좌회전해 섬 안쪽으로 접어 들어갔다. 해안도로에도 차가 많지 않았는데 이 동네는 차가 잘 안 보이네. 나야 좋지. 스쿠터를 타면 사방팔방이 뻥 뚫려있고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니까 해방감이 들기는 하는데, 그만큼 언제나 등 뒤쪽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50cc 스쿠터를 탄 사람이라면 뒤로 따라오는 차들에게 길을 양보하고 느릿느릿 가는 게 마음 편하다.


 



다음 행선지인 명월리 팽나무 군락지를 향해 가는 길에 검은 성벽이 눈에 띄었다. 명월성(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9호)이다. 가이드북에는 조선 시대 군사 시설이라는 짤막한 언급만 있고, 내비게이션에는 명월성지라고 뜬다. 유홍준 교수가 "엄연히 문과 벽이 일부나마 남아있는데 '성터'라고 부르다니"라며 못마땅해 하는 곳이기도 하고.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도 튼튼하게 쌓여있고 올라갈 때 조심하라는 팻말도 서 있어서 조심스럽게 올라가 보았다. 성벽 위에 올라서니 한림 앞바다와 너른 들이 훤히 내다보였다. 성벽까지 쌓아 연안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뭐였을까. 성벽에 걸터앉아서 이곳을 지켰을 옛날 제주 사람들을 상상해 보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 편'은 명월성이 왜구 침략에 대비해 지어졌다고 설명한다. 성은 조선 중종 대에 목성으로 처음 세워졌지만 코앞의 비양도와 명월포는 고려 시대부터 군사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니 제주 사람들이 외적에 시달린 역사는 그 이상으로 길 것이다. 중종 대에 와서야 성을 쌓은 게 도리어 조금 늦었던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바다는 제주인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울타리 없는 앞마당이기도 하다. 가족과 이웃의 안전을 위해 불안한 눈으로 수시로 바다를 훑어보아야 했을 제주 사람들의 삶이 여러 모로 고단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제주가 여유와 낭만을 좇는 이들의 환상의 섬이라는 걸 알면, 챙기고 돌볼 것이 많았던 옛날 제주 사람들이 '배부른 소리'라고 하려나.


 



11월이지만 제주의 바닷바람은 그다지 거칠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성벽 위에서 한참 멍 때리며 광합성을 즐겼다. 성벽에서 내려와 보니 똑같이 햇볕 쬐는 멍 동지가 있어 우쭈쭈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으르렁 그르렁. 건드리지 말라고 정색 정색 개정색을 하더라고. 그때는 그냥 개까칠한 개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들개였던가 싶다.


 



조용한 시골길을 조금 더 달려 명월리 팽나무 군락지 도착. 군락지라고 해서 맹그로브 숲처럼 나무가 울창한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내 상상이 너무 거창했나 보다. 사실 첫눈에 썩 마음에 드는 곳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니 별로 실망할 것도 없다. 단지 작은 개울을 따라 서 있는 나무가 뭐가 대단하다고 가이드북에 소개되기까지 했는지, 조금은 어리둥절해 하며 스쿠터를 한쪽에 세워놓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나무 하나하나가 수백년 이상을 산 노거수라고 한다. 가장 어린 나무가 100년 정도 되었다니 그 3분의 1도 안 산 나는 아 응애예요



막상 걸어보니 이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묘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자란 듯한 옹이진 줄기나 가지는 계속 보고 있으려니 우락부락한 근육 같아서, 나무라기보다는 조각상을 감상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무 몸통도, 나무들이 개울에 늘어뜨린 그늘도 워낙 짙어서 조금 으스스한 기분도 들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여행 닷샛날 송당 본향당에서 팽나무를 다시 보고서야 그 무거운 분위기가 서늘하긴 해도 두렵지 않고, 경건하면서도 친근했던 기억이 이해되었다.


 

성이시돌 목장



가는 길에 성이시돌 목장이 있어 어떤 곳인가 궁금해서 들러보았지만 한가롭게 풀 뜯는 조랑말 말고는 별 게 없었다. 채 20분도 머무르지 않고 나와서 바로 새별오름으로 향했다. 가을 햇볕이 기울어지는 걸 보니 새별오름까지 보고 모슬포로 내려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다.

처음 자유의지로 올랐던 오름은 두 번째 스쿠터 여행에서 방문했던 금오름이었다. '효리네 민박'에 나왔다던가. 난 트와이스의 '시그널' 뮤직비디오 촬영지라서 갔지만.



'17 금오름



어떤 곳인가 궁금해서 정신없는 일정에도 굳이 찾아갔던 곳인데, 금오름에 오른지 5분도 채 되지 않아서 나는 등산만큼 힘들지는 않겠지라며 만만하게 본 대가를 치르는 기분이었다. 금오름은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가팔랐다. 좁고 가파른 오르막길은 시멘트로 덮어 딱딱하기까지 해서,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만한 길은 아니었다. 그런 곳을 나는 밑창이 얇은 벤시몽을 신고 갔으니... 패러글라이딩 손님들을 태우고 별 힘 들이지 않고 오름을 오르는 봉고차를 보니 부아까지 치밀 정도였다. 힘들었다. 겁나 힘들었다.



'17 금오름 정상에서



멋모르고 올라왔다가 개고생하네, 투덜거렸는데 막상 정상에서 본 전경이 시원시원해서 화가 좀 누그러졌다. 여기가 근방에서 가장 높은 곳일까? 금오름 정상에서는 수평선을 따라 주변 오름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낮은 제주 가옥들이 여기에서는 이보다 더 작고 납작해 보일 수가 없었다. 풍경 자체에 미니어처 효과라도 건 듯. 생각보다 괜찮은데?


 

'17 금오름 정상에서



그때의 기억이 좋게 남아있어서 제주 서부에서 으뜸이라는 새별오름을 일정에 넣었다. 억새철이라서 금오름을 올랐을 때보다 더 근사한 풍경도 볼 수 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한라산 서쪽에서는 가장 큰 오름이라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하는 오름, 가장 크고 유명한 곳부터 가 본다는 생각이기도 했고. 아 물론 이번에는 벤시몽은 신지 않았다. 첼시 부츠, 그것도 쌔끈한 검은색의 새 부츠를 챙겼다. 정말 나 제정신이긴 했던 걸까.


 



새별오름으로 가는 길은 일부러 오름과 오름 사이 좁은 길을 골랐다. 한적한 내륙 도로일수록 속도감과 해방감을 동일시하는 자동차 운전자가 많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조심해야 할 차도 갑자기 튀어나올 사람도 없어서 다들 과감해지는 건지 뭔지. 게다가 1차선 도로가 유독 많아서 다른 차에 길을 비켜주고 뒤따라갈 공간 여유도 넉넉지 않았다. 장난감 태엽 자동차마냥 뽈뽈뽈 달리는 스쿠터를 모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풍경 감상을 위해 조심하고 감수해야 할 것이 많았다 - 이게 2017년 스쿠터 여행에서 장쾌하게 뻗은 직선 중산간도로를 달리며 얻은 교훈이다.

오름과 오름 사이는 매끈한 포장 도로만 있지는 않았다. 양쪽 엉덩짝에 번갈아가며 곤장을 두들겨 맞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본 적은 없지만.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약간의 멀미와 함께 지나자 서서히 새별오름의 둥근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 고통도 금방 끝나겠다고 기대하는데, 길 양옆으로 야트막한 돌담과 봉분이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뭐 이런 데 무덤이 다 있어?' 내심 놀라며 주위를 훑는데 억새풀 사이에서 사람들이 불쑥 걸어나와 기겁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니까. 게다가 다들 손에 낫처럼 보이는 걸 쥐고 있어서 머리털이 곤두섰다. 무덤은 왜 또 점점 많아지는 건지. 조금 더 달린 곳 한 켠에 주차된 트럭과 그 위에서 사발을 들고 있던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과, 어깨 높이까지 자란 억새풀 틈에서 눈에 띄게 훤하게 드러난 봉분들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아, 벌초구나. 트럭 화물칸에 앉은 사람들이 무섭지 않은 척 천천히 달리는 나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는 걸 흘깃흘깃 보면서 이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이런 데 스쿠터를 몰고 왔어?'

대충 납득하고 지나갔지만 왜 그곳에 그렇게 많은 무덤들과 뒤늦은 벌초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내내 궁금했다. 이틀쯤 지나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더니 중산간 오름에 무덤이, 나아가 마을 공동 묘지가 있는 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라고 한다. 한라산 자락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는 제주인의 생사관 때문이라나. 풍수지리가 제주 사회에 도입되면서 원래 집 근처나 밭에 묘지를 썼던 것이 오름이나 한라산 중턱까지 퍼져나갔다고 하니 내가 본 것도 제주 사람들의 오래된 믿음일 것이다.

명월성에서 본 바다와 새별오름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갔다. 육지에서 놀러온 내 눈에는 둘 다 가 볼 만한 관광지이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옛 풍습을 지켜갈 일상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고 할까. 새별오름 근처 무덤을 보고 놀란 사람들의 후기가 많은 걸 보면 나만 '관광지' 새별오름의 이면을 생각지도 못하고 겁먹었던 게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그만큼 육지 사람과 제주 사람의 시선이 다르겠구나 싶기도 하고.

급 등장한 무시무시(?)한 풍경에 살짝 기죽었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좁은 길을 통과하니 새별오름 주차장이 나타났다. 돌아보니 내가 지나온 길은 주차장 한 켠에 난 샛길 같은 곳이었다. 그나마도 높이 자란 억새풀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고.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갈대 틈에서 불쑥 나타나니 오름 입구 방향으로 걸어가던 사람들도 놀라서 흘깃흘깃 쳐다봤다. 이 좁은 길이 대체 몇 사람을 놀래키는 건지.





새별오름에 관한 팁 하나.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절대 오름 좌면에 난 길을 고르지 말 것. 경사도가 직각에 가까워서 힘들기도 오지게 힘든데 높기까지 해서 한참 올라가야 된다 이거예요. 가파른 길에 똑같이 쩔쩔매는 사람들 때문에 안전 밧줄을 붙잡지 못할 때, 그런데 마음은 급할 때는 사족 보행을 하다시피 하면서 간신히 정상까지 올랐다.

그래도 억새는 볼 만 하네.

새별오름 주차장에 선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새별오름을 간단히 소개한 그 안내판에는 '매년 3월 새별오름 한 면에 통째로 불을 놓는 들불 축제가 열린다'고 쓰여 있었다. 봄이 오기 전 목축지에 불을 지펴 묵은 풀과 해충을 잡기 위해 하던 '들불놓기'가 축제로 발전한 듯 했다. 쉽게 말해서 쥐불놀이한다는 거네. 그런데 스케일이 엄청나다. 이 큰 오름을 다 태운다니... 들불축제 사진 속 새별오름은 오름이 아니라 거대한 불산처럼 보였다. 용케 산불이 안 났네 싶더라니까.

 

 

 


이제 슬슬 갈까. 이미 오름 경사면을 오를 때부터 햇살이 비스듬히 누워서 억새에 황금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야 그 빛나는 풍경을 좋은 마음으로 감상했지만 가장 빛나는 순간부터 어둠은 찾아온다. 쉽게 말해서 어둠 속 공포의 스쿠터 운전을 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오름에서 내려가서 모슬포까지 열심히 핸들 기어를 돌려야 한다는 뜻이다.

 

 

귀여워...



여행의 첫 두 밤을 지낼 곳은 모슬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활엽수. 첫 여행에서 딱 하룻밤 묵었는데 마음에 들어서 이때는 일찌감치 2박을 예약했다. 오래된 제주 가옥을 부부 둘이 깔끔하고 정감 가는 곳으로 고쳐놓았을 뿐인데 왠지 이곳에서는 시간이 느릿느릿 온화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또 가 봐야지 벼르고 있었다. 체크인하고 안내받은 방은 마루바닥에 이불 펴고 자는 싱글룸. 전기장판도 있으니 온도 올려놔야지. 하루종일 찬바람을 맞고 다닌 날 밤에는 꼭 뜨끈한 물에 목욕을 하거나 온돌에 등짝을 지지면서 자야 한다.


 

하츠돈카츠 (not bad)



그렇지 않아도 늦은 오후가 되면서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콧물이 났다. 숙소에 짐만 풀어놓고 모슬포항으로 걸어갔다. 시골 동네이지만 편의점도 있고 병원도 있고 중앙 시장도 꽤 크게 있고, 뭐 아무튼 필요한 건 다 있다. 가장 먼저 약국에서 종합감기약을 샀다. 근처 다이소에서 붙이는 핫팩까지 사고 활엽수에서 동네 맛집으로 추천한 돈까스 가게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첫 여행에서 우연히 들어갔던 밥집에서 그때처럼 된장찌개를 시켜 먹고 싶었는데, 새까맣게 어두운 저녁에 정말 우연히 들어갔던 곳이라 어딘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마음 편하게 숙소에서 추천하는 곳으로 갔다. 그냥 유일한 돈까스집이라서 맛집으로 쳐 주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나쁘지도 않은 맛이었다.


 



식당에서 나오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이 동네는 평화로워서 좋은데 참, 길에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어. 조도가 낮게나마 가로등이 서 있지만 그마저도 어떤 골목에는 있고 없고. 밥만 먹고 종종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와 감기약 먹고 전기장판 위에 깐 이불로 쏙 들어갔다. 하루종일 울퉁불퉁한 길을 달렸더니 궁둥이가 욱신욱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