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도 아니고, 전쟁 세대도 아닌데 꼭 내가 아우슈비츠에 갇힌 홀로코스트 피해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이 영화로 알게 된 홀로코스트는 폭력이나 공포, 두려움, 비극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그 이상의 그 무언가 같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홀로코스트 영화는 망상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지옥이라는 말도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아. '지옥'은 [사울의 아들] 속 아우슈비츠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크나큰 감정의 진동 폭을 암시하는 단어 같아서.
그곳에서의 진짜 삶은, 슬픔이나 울분과는 다른, 건조하고 비인간적이며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울함 그 자체이자 깊게 패인 상처 같기도. 영화 속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걸 티끌만큼도 찾을 수 없는 사막이었다. 모든 인간적인 것-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겠지만-과, '살아있다'고 느낄 만한 것들이 철저하게 잊혀진 곳에서 장례를 통해 유일하게 인간다운 행위를 하는 사울이어서 더 처절하게 목이 타 들어가는 듯 했다.
이런 이유로 화면 비율 4:3을 고집하는 이 2D 영화를 감히 체험형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주인공 사울의 운신의 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촬영 기법과, 흐릿한 배경과 있는 그대로의 음향으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해 더욱 미쳐버릴 것 같은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사울의 아들] 특유의 묘사법은, 내가 이 영화를 그렇게 부르고픈 또다른 이유이고. 사울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걱서걱한 모든 소리와 통일성 없이 뒤섞인 아우슈비츠 내 모든 사람들의 언어가 온몸을 죄어오는 것 같았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끝없(어 보이)는 사과와 반성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꼭 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였다. 한 마디 더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우리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이야기도 이렇게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눈물이나 드라마를 강조하는 것보다, 절제하고 별 장식 없이 내놓는 게 가슴을 후드려 패는 것 같을 때가 종종 있지 않나. 기교도 쓸 때 써야지. 안 그러면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역사 속 비극은 있는 그대로 슬픔이고 잔인한 기억이기에, 극적인 장치는 크게 필요치 않다.
라즐로 네메스의 철저한 고증 정신만 본받는다면야.
2016.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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