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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츠를 통해 일본에 입국해서 교토로 갔던 지난 여행과는 달리 이번에는 간사이 공항으로 들어가 곧장 고베로 들어갔다.

딱 두세 시간, 그나마도 포트타워 근처만 돌아봤던 고베가 궁금해져서 교토고 오사카고 뭐고 바로 고베로 들어가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그 결정에 가장 적합했던 교통편은 간사이 공항과 고베 공항을 오가는 페리였다.


(간사이 공항에서 고베 공항으로 가는 페리를 타는 법은 블로그 검색으로 얼마든지 알 수 있으니 나는 생략한다)


그리고 배를 타러 가는 길에서, 이 짧은 나들이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자 이날 모든 고생의 시작이 된 일이 일어났다.


공항 입국장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페리 선착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던 순간, 덜컹.


휘청, 하고 오른쪽 발목이 살짝 꺾였다. 발목이 튼튼한 편은 아니라 자주 있는 일이라 이번에도 미끄러졌나 싶었는데, 발을 훑어보던 내 눈에 뭔가 이상하게 띄었다.








???????????????????????



아니... 잠깐...


이틀 전에 닦았는데? 몇 주 전에 엄마가 수선집에도 가져가서 굽도 새로 갈았는데?! 그보다 10초 전만 해도 멀쩡했는데?!

나 또 가져온 신발 없는데?



........




응... 내 마음에 파도가 쳐...


어쩌면 저렇게 깔끔하게 떨어졌담. 못을 세 개나 박았는데 그 못들이 꼭 칼로 벤 것처럼 전부 떨어졌다. 여행을 떠나며 상상할 수 있는 여러 응급 상황-감기 몸살이나,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거나, 배탈이 나거나, 지갑을 잃어버리거나 등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부츠 굽이 떨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 이 신발을 신고 지난 교토 여행 7박 8일도 빨빨빨 돌아다녔는데. 보험사도 이런 일은 계산에 넣지 않았을 거다.


일본 여행 카페에 구두 수선점이 없냐는 글을 올리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새 신발을 사라고 한다. 새 신발을 사? 급하게 내가 가진 돈을 떠올렸다. 비상금으로 만오천엔 정도... 아 그건 나중에 정말 갖고 싶은 거 생기면 사려고 가져온 돈인데. 카드는? 안 쓰기로 해서 그다지... 무엇보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돈을 써야 한다는 게 탐탁치 않았다. 애초에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저런 부츠 신고 여행 갈 패션 센스인데 급하다며 얼마가 될 지 모를 신발을 사러 돌아 다니는 게 더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고베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는 구두 수선점을 알아봐 줄 정도로 친절했다. 내가 짐 정리를 하는 사이, 스태프 A는 구글링을 한 모양이었다. "여기 가면 신발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없을 수도 있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그래도 그 건물에 신발 매장도 있다고 하니 급하면 신발을 사야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A가 구두 수선점이 있다며 구글 맵으로 찾아준 쇼핑몰은 호스텔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되는 곳이었다. JR을 타는 것도 돈이 아깝다며(쓸데없는 데서 자린고비ㅠㅠ) 걸어서 가기로 하고 골목길을 걷는데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났다. 비유하자면 내가 걸음을 뗄 때마다 내 오른발에서 스님이 목탁 두드리는 것 같달까, 아니면 내가 게다를 신고 걷는 것 같달까. 한산한 골목길에서 나 혼자 창피해서 오른발에 무게를 싣지 않고 걷는데 허리가 아파왔다. 이게 무슨 고생이야 진짜.


수선점 못 찾으면 그것도 운명이지, 할 수 없어도 신발 새로 사야지(torrrr....)라고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쭉 걸었다. 허리도 무릎도 발바닥도 벌써 저려왔다. 조금만 더 하면 발바닥과 발목이 악다구니를 쓸 것 같았다. "야 이 주인 놈아!!!!!!!" 나라고 안 힘드냐. 이 신발, 이 몸으로 앞으로 4일을 어떻게 다녀.


A가 알려준 건물로 들어갔는데 왠걸. 어린이 병원과 하이마트 같은 전자 매장 뿐이었다. 최고층까지 오르내리며 확실하게 구두 수선점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돌아나오는데 아.. 눈가가 왜 이리 촉촉하죠...?ㅋㅋㅋ


번화가인 산노미야로 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이렇게 일일이 돌아다녀야 하나라며 절망하고 있을 때, 청소부 아주머니가 분주히 일하는 게 보였다. ...물어볼까? 밑져야 본전인데. 아주머니를 불러서 너덜너덜해진 부츠 굽을 보여주니 단번에 상황을 파악해 주셨다ㅠ 신발이 이렇게 되어서... 신발을 고치거나 새로 살 곳이 없을까요? 여기 가면 할 수 있다고 해서 걸어왔는데 이 건물에는 없나요? 아주머니가 열심히 이것저것 가르쳐 주셨지만 그 연민 가득한 수많은 단어 중에 들리는 건 "무꼬노 비르딩네?" 뿐이었다. 여기 말고 저쪽.








그러니까,


여기 말고,











여기 

Blumer HAT Kobe (ブルメールHAT神戸)










Source : Google


이렇게 생겼다.



3층이었나, 반신반의하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ABC 마트가 보였다. 여기서도 한참 서성이다가 용기내어 점원에게 "(신발 가게에서 이런 말 하기도 좀 뭣 하지만)저... 혹시 여기서 부츠 고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아, 그거라면 여기보다는 저쪽에 가게가 있어요"라며 직접 데려다 주었다. ABC 마트 바로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한 뼘 가게에서 아저씨가 윙 소리를 내며 기계에 굽을 갈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신발을 보여주니 그때부터는 말이 필요없다. 수선공 아저씨는 내가 필요한 게 뭔지 바로 알아채고 굽에 박힌 못을 뽑고, 접착제를 바르고, 새 못을 박아주었다. 접착제를 바르는 걸 보고 좌절 먼저 하면서 '저걸로 끝이면 내가 아는 일어 총동원해서 진상 부린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능숙하게 못을 4개나 박아주셨다ㅋㅋㅋㅋㅋ 심지어 돈도 540엔 밖에 안 받으셨다. 헐. 한쪽만 신발을 신은 채로 뻘쭘하게 서 있다가 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건네주는 신발에 감격했다.


'고베의 신발 장인'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단어를 몰라 "명인님!"이라고 대뜸 불렀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전해졌겠지 뭐.


아무튼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나들이 같은 이 여행에서 돌아와 만난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꼭 무슨 징조 같다고 한다.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역시 유쾌한 에피소드는 아니다. 아니, 별 일이 없었다면 그냥 여행에서 맞닥뜨린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여졌으려나.


이날 저녁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니 A가 신발은 고쳤냐고 물었다. 덕분에 잘 찾아가서 제대로 고쳤다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비록 신발 고치느라 한참 걸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은 다 버리고 몸은 녹초가 되어서 차이나타운의 만두도 내키지 않을 정도로 지쳤지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나마 다행이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여행을 위해 애써 밝은 면을 보려고 했는데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 줄, 나라고 어떻게 알았을까. 인생이 이렇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날의 기억을 이렇게 성의 없게나마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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