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기록: About Me/내킬 때 쓰는 일상

아나바다의 '아'를 시도한 9월; 나의 노트북 셀프 업그레이드

 

 

7월에 노트북이 고장나 난리 부르스를 췄다는 글을 썼다.

 

https://obsessedwithrecord.tistory.com/entry/%EB%82%98%EC%9D%98-%EB%85%B8%ED%8A%B8%EB%B6%81-ft-%EA%B7%B8%EB%A6%AC%EA%B3%A0-HP-m27fw?category=137954

 

나의 노트북 (ft. 그리고 HP m27fw)

나에게는 10년째 쓰고 있는 노트북이 있다.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 샀던 것이다. 당시 쓰고 있던 삼성 노트북보다 훨씬 가볍고(2.15kg 대 1.18kg... 비교 불가다) 깔끔한 흰색 외관과 선명하다 못해 눈

obsessedwithrecord.tistory.com

 

햇수로 10년째 쓰고 있는 노트북을 향해 구구절절 낯간지러운 코멘트를 쏟아냈고 거기에 새로 산 모니터 후기를 곁들였는데

새 모니터를 들이고 한 나흘 지났을까

괜스레 노트북의 느린 구동 속도가 거슬려서 윈도우를 싹 밀어줬다.

간단한 작업 후 노트북 전원을 켰는데, 엥. 노트북 모니터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멀쩡히 화면을 띄우는 거다.

이러다 또 고장나겠지 했는데 계속... 계속 멀쩡하더라고.

공식 서비스센터의 수리 기사가 "고장났다"고 사망 선고를 내린 모니터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게 내 노트북은 돌아왔고(?) 나는 노트북이 잠시 정신 나가있던 사이에 대형 모니터를 사고 싶었던 평소의 소비욕 때문에 20만원을 태웠다는 이야기 되시겠다.

 

처음에는 괜히 돈 썼다는 생각에 조금 분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모니터보다는 노트북이 멀쩡해졌다는 데 기분이 더 맞아들어가서

금방 유쾌해졌다(참 단순...).

그래도 느린 속도만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노트북 그거 오래되기도 했겠다, 이참에 생각만 해 오던 셀프 업그레이드를 해 보았다.

 

 

 

6,000원(+무료배송)이지만 체감 가격 9,000원인 드라이버

 

다이소 정밀 드라이버도 괜찮다는 셀프 업그레이드 후기를 여럿 보고 처음에는 다이소 정밀 드라이버 세트를 샀는데 웬걸

내 노트북 나사에는 맞지 않아 헛돌았다. 8월 더위가 채 가시지 않아서 땀 흘리며 조금 더 비싼(그래봐야 3천원) 세트로 교환해 왔는데

이것도 안 맞기는 매한가지... 게다가 이번엔 무슨 계산 착오인지 점원이 종이로든 전자로든 영수증 발급을 안 해 줘서 환불도 안 된다.

슬슬 올라오는 빡침을 누르면서 서치 끝에 이 드라이버를 추천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바로 주문했다.

 

다이소 드라이버들보다 비싼 데다 이번엔 배송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안 맞으면 드라이버에게는 죽음 뿐이다'를 되뇌었는데

이 드라이버 최고ㅋㅋㅋ 나사와 혼연일체인 듯한 핏(fit)감부터 지구 맞은편 아르헨티나에 닿을 때까지 돌려도 문제없을 것 같은 내구성까지 다 완벽했다. 돈 아껴서 가성비 업그레이드해 보려다가 괜히 드라이버 따위에 돈만 더 썼네 쳇.

 

 

 

 

 

그렇게 뜯어본 내 노트북의 민낯. 일단 눈으로 직접 메모리 사양을 확인하고 싶어서(프로그램으로 확인했지만) 한 번 뜯어본 거였다.

사진 상단 정중앙의 남색 칩이 내 노트북의 4GB짜리 메모리 램이다. LG로부터 호환 가능한 메모리 용량이 8GB라는 답변까지 받았으니 바로 새거 시켜 시켜.

 

 

 

난 왜 인터넷 쇼핑을 하면 맨날 금요일에 해서 주말 이틀을 더 기다리는 걸까

 

 

 

새 메모리로 바꿔 바꿔

 

교체 작업은 간단했다. 기존 메모리를 사선 방향으로 살짝 들어올려 꺼내고 그 역순으로 새것을 끼우면 끝.

후기를 쭉 읽어보니 메모리를 바꿔 끼우다가 다른 부품까지 건드려서 고장낼까봐 많이들 이 작업을 어려워하는 듯 했다.

어렵다기보다는 필요 이상으로 겁내는 거겠지. 그 조심스러움, 공감한다.

 

컴퓨터 하면 쓸 줄만 알지, 고치거나 부품을 하나하나 공부할 생각은 못하잖아.

맥북이든 갤럭시든 새로운 전자기기가 나와도 IT 유튜버들이 호들갑스럽게 추켜세우는 스펙에 그대로 납득해버리는 거, 사실 일반 소비자 99%가 그렇게 하지 않나? 사실 뭐가 대단한 건지는 모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최대 미덕은 역시 소비 아니냐며. 충동 구매, 지름 뭐 이런 거면 더 좋고.

 

 

 

인텔 코어 3세대ㅋㅋㅋㅋㅋ

 

설치가 끝난 후 부팅해서 완벽하게 인식되는 것까지 확인했다.

사실 메모리 교체 전에도 노트북 속도가 심각할 정도로 느렸던 건 아니어서 두드러지는 변화는 체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이 인터넷 속도가 더 느린 것 같은데, 왜지?

 

가장 바꾸고 싶었던 멀티태스킹 속도만큼은 눈꼽만치 개선되...었다고 합리화하고는 있는데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따져보면 100퍼센트 만족스러운 셀프 업그레이드는 아니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에 감탄하고 만족하려면 최신 노트북 밖에는 답이 없을 것이다.

 

다만 단순히 속도 때문에 (사용에 큰 지장이 없는데도) 새 노트북을 산다는 건 지나친 소비라는 생각이 든다.

노트북 셀프 수리를 마무리하고 지난 몇 주를 돌아보았다. 견물생심이라고, 노트북 모니터가 고장난 김에 새걸로 바꿔보자 싶어서 최신 노트북을 알아보는데 눈이 핑핑 돌아가긴 했다.

이거는 화면 해상도가 500nit 이상이라서 좋다, 저건 CPU가 라이젠 7세대라 가성비 좋고 개빠르다 뭐 이런 소개글이나 후기를 몇 편 읽으니까 컴퓨터 부품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나도 그냥 갖고 싶어지고. 그러다가 맥북 에어 M2까지 욕심이 미쳤다.

 

그래도 나는 맥북 에어 M2가 나한테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인 걸 너무 잘 알아ㅋㅋ 지금 내 상황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라는 나 자신의 반대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해서 결국 맥북 주문은 물론 최신 노트북 구입 자체를 그만두었다.

내 노트북은 비록 모니터가 깜박이고 멀티태스킹을 힘겨워하긴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기능과 성능은 문제되는 부분이 없다.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의 내가 컴퓨터에 요구하는 작업 수준에는 지금 이 노트북의 기능과 성능도 충분한 거겠지. 물건이 있으면 그걸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눈을 뜨지 않을까?하며 맥북 에어 M2로 동영상 편집을 하다가 백만 유튜버가 되는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월 700이 계좌에 꽂히는 삶을 꿈꾸... 커피 그라인더가 핸드드립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주었듯이 최고 사양의 최신 노트북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만 나는 안다, 내가 영상 시대에 사람들을 빵빵 터뜨릴 영상 감각도 크리에이터로서의 비전도 없다는 걸.

물건을 아껴쓰고 다시 쓰자고 마음 먹을 수 있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짚어보게 된 대목이었다. 미니멀리즘에 대해 생각해 볼 때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또 하나, 새 노트북 구입을 단념했던 이유는 걱정이었다.

여전히 멀쩡한 노트북을 버렸을 때, 이 전자 '쓰레기'는 과연 제대로 재활용이 되기는 할까 하는 걱정도 내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플라스틱이 쌓이는 것도 전 인류가 쩔쩔매고 있는데 내 노트북에 쓰인 납과 주석은 훨씬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지 않을까. 대단한 환경 보호 의식도 없고 내가 버린 노트북 하나가 얼마나 엄청난 위험을 야기하겠냐마는, 그래도 세상이 나빠지는 데는 1도 기여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는 부품인데, 단순히 쓰레기로 분류되어 버려지고 만다면... 어떤 면에서는 참 대~단한 낭비다. 이렇게 내 구두쇠 마인드를 전 지구적 차원으로 (거창하게, 본의 아니게)확장한 결과가 이번 셀프 업그레이드라고 해야 하나ㅋㅋㅋ 그게 기대하던 만큼의 성과를 냈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지만.

 

고작 노트북 메모리 하나를 교체하는데도 알게 된 것이 상당하다. 메모리의 역할은 기본이고 다른 컴퓨터 부품 각각의 기능부터 컴퓨터 작동 원리까지, 어디서도 배울 수 없던 것들-아니, 배울 생각을 할 일이 없던 것들-을 꽤 알게 되었다. 이제 어디 가서 컴퓨터에 대해 아는 척 좀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더해 미니멀리즘, 제로 웨이스트, 자본주의, 친환경, 나 자신의 현재와 필요를 파악하는 것의 의미 등등에 대한 나름의 정의(definition)도 이 작업의 부수적인 이득이었다. 머리 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니던 모호한 개념들이 비로소 나의 언어로 정리되는 듯 했다. 그것들을 적확하고 완전한 문장으로 구사하려면 좀더 깊은 생각과 자료 읽기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어떤 행위의 의미를 내 말로 말하는 첫걸음을 뗐다고 생각하면 좀 낫다.

 

내 어린 시절의 한 토막에는 IMF 외환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 시절 교내외 글짓기 대회의 단골 문제()는 '아나바다'였다. 어른들은 엄혹한 시기에 '아껴쓰고 나누어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의 줄임말을 통해 우리에게 절약을 강조했는데, 그 물음으로 어른들이 정말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싶었던 건 세상을 이해하여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한 지혜로서의 '아나바다' 아니었을까. 정말 그런 의도였다면, 오래된 노트북을 아껴쓰려고 메모리를 바꾼 이번 늦여름은 2n년이 지나 그 기대에 부응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조금 억지스럽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