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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가을과 겨울 #2 후원으로 간다. 여기서부터는 해설사가 동행해야 한다. 창덕궁 전각들을 돌아보는 사이 몸이 얼었다. 다른 데는 괜찮은데, 얇은 첼시 부츠로는 아무래도 한겨울 야외 활동을 견디기 어려웠다. 조금 튀어도 무릎까지 올라오는 털 부츠를 신었어야 했나. 좀더 보온에 신경 쓰지 않은 나와, 똑같은 날씨를 코트 한 벌과 목도리로도 거뜬히 견디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추위를 타는 것인지 저 사람이 추위를 안 타는 것인지, 아리송하고 왠지 억울해지는 사이 예약 시간대의 해설사가 입구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 앞에 섰다. 가을에 왔을 때는 같은 시간대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99명이었다. 나까지 더하면 100명. 한손에 쏙 들어올 듯한 휴대용 앰프와 마이크를 든 해설사 한 명이 이걸 다 통솔할 수 있어? 내심 ..
창덕궁의 가을과 겨울 #1 2022년 새해를 대비해 2021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창덕궁 후원 예매. 2019년 가을에 다녀온 후로 후원에 다시 가고 싶어 적당한 시기를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딱 1월 첫째 주 말에 눈이 내린다는 기상 예보가 떴다. 눈 내린 하얀 고궁을 보는 걸 '이번 겨울에 꼭 할 일'로 꼽아두고서도 정작 2021년 첫눈이 내린 날에는 후다닥 궁으로 달려가지 못한 걸 두고두고 아쉬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지. 정작 창덕궁을 다시 찾은 날에는 기대만큼 눈이 내리지 않았고 내가 본 것은 눈이 소복소복 쌓인 궁이 아니라 낙엽도 채 남지 않은 삭막한 풍경이었지만 3년 전 가을과 이 겨울의 풍경을 머리 속에서 비교하며 궁을 둘러보는 것도 고궁을 좀더 다양하게 살펴보는 방법이지 싶다. 대강 '이번보다 지난 가을에 찍..
210915_말하기 어려운 시대 (ft. 의식의 흐름) 오랜만에 쓰네, 하루에 한 줄. 일년에 한 줄로 고쳐야 하나? 나 요즘 '금쪽 같은 내 새끼' 열심히 봐. 미래를 걱정해 줘야 할 애는 없지만, 오은영 박사님이 부모들에게 해 주는 말을 덩달아 듣고 있다 보면 나도 새겨 들을 만한 말이 많더라고. 내 어린 시절에 대입하게 되는 말도 더러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공감한 건 '말'에 관한 거였어.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부모들의 가장 흔한 고민은 아이의 '떼'야.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얻을 때까지 악을 쓰며 조른다고 하소연해. 아이의 떼쓰기를 유발한 원인과 맥락은 케이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은 아이들이 자기 감정을 좋은 말로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는 거야. 아이들은 배우지 않았으니까 모를 수 밖에 없고. 그러니 부모가 해야 하..
['17 서울야행] #Ep3 주말 낮, 서촌에서는... 다음 목적지는 통인시장. 박노수 미술관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면 곧바로 시장 입구가 나온다.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후 내게 골목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서촌에서 통인시장 찾기'는 마음을 다스리는 행동 치료 역할을 했다. 그만큼 쉽다. 통인시장 가는 길에 지나친 맛집과 카페자주 지나다녔는데 아직까지 못 가 봤네. 밥도 먹은 마당에 시장은 왜 왔나 하겠지만, 첫 번째 이유는 경복궁에 가기 전에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했고 두 번째로는 후식으로 먹을 간식 없나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서촌에 있는 서울 시내 유명 시장으로 매스컴도 여러 번 탔던 곳이라 호기심이 일었다. 막상 와 보니 통인시장은 건물 사이에 아케이드를 만들고 지붕을 덮은 모양새다. 오일장 같은 게 아니라 상설이구나. 내가 자란..
201121_책 또 버리기: 책장은 미니멀, 지식은 맥시멀 책을 또 버렸다. 미니멀 라이프는 중독인 걸까. 지난 7월, 작정하고 책을 중고로 팔거나 버린 이후로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또 처분할 것이 없나, 깜박 하고 버리지 않은 건 없나, 하고 책장을 훑어보는 습관. 인터넷 중고서점에서는 매입가를 높게 쳐주지 않기 때문에 중고책 팔기가 쏠쏠하긴 해도 큰돈을 만지는 일은 아니다. 내 경우에는 돈보다는 책장에 빈 공간을 만들어가는 게 훨씬 즐거웠다. 빈 공간이 늘어갈수록 책장에 가득 꽂힌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책장에 꽂힌 책은 분명 취향이 반영된 결과이지만, 현재의 나도 과연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의 자아는 그 어느 순간에도 완성되지 않고, 그 자아를 형성하는 인간 내외의 모든 자극과 아웃풋도..
[국체론] 극일보다 지일해야 하는 이유 평소 눈여겨 보던 출판사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이 책의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작년 '사쿠라 진다'와 '속국 민주주의론' 그리고 '영속패전론'에 이르기까지, 시라이 사토시의 책을 (어쩌다 보니)놓치지 않고 읽어온 터라 고민할 것도 없이 냉큼 신청했고, 당첨되었다. 서평이라는 걸 써 본 적이 없어서 바로 후회했지만. SNS 등에는 글자 수 제한이 있으니 중언부언하는 나한테 SNS 서평 쓰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블로그에서 조금 길게, 서평 아닌 감상에 더 가깝게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지난 9월 14일,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가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그 뒤를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가 이었다. 자민당 총재 선거 승리 후 스가 신임 총리는 "아베 총리가 추진해 온 정책을 계승해 나가는 것이 나의 ..
[나무의 시간] 은은한 나무 내음 #삼다독 #나무의시간 연휴 직전 대출. 존재는 알았지만 나무에는 관심도 없어서 모른 척 했는데, 실물을 보니 책 표지가 고즈넉하고 부들부들 촉감이 좋고 결정적으로 도서관 책 치고는 꽤 깨끗해서 빌려왔다(초 3 여름방학 숙제인 독후감 첫 줄로 '선생님이 쓰라고 해서 쓴다'고 썼다가 개학날 선생님이 애들 앞에서 내 독후감을 낭독하신 게 갑자기 기억나네. 감각적이고 시니컬한 독서는 유구하다). 전문 서적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훌훌 읽을 수 있겠지만, 나무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훨씬 무겁고, 그 애정으로 쌓아올린 지식과 감상은 소재와 분야를 넘나든다. 300쪽이 넘도록 이야기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애정은 어떤 것일까. 그런 애정을 그 무엇에도 가져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부럽기도, 존경스럽기도 하다. 한 나무..
200802_컴백 투 디 어스 최근 3주는 머리를 비우는 시간이었다(원래 아무 것도 안 들었다만...). 책과 옷 등 끌어안고 산 물건도 치웠고. 내면과 책장의 빈자리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로 채웠고, 정신없이 책을 읽으며 관심사는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책을 사거나 빌릴 것인가로 옮겨갔다. 그 사이에 7월이 지나 8월이 왔다. 2020년도 3분의 2가 지났다. 책을 읽어 좋은 점은 여럿이지만 내 경우에는 무기력해지지 않았다는 데서 독서의 가장 큰 장점을 찾았다. 늘 하던 대로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잤다면 늘 후회해 온 대로 무력하고 공허한 일상에 파묻혀서 회복하기까지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반응하고, 주제에 관해 생각하고, 그것을 여러 편의 메모로 남기면서 내 머리가 쉬지 않고 굴러갔다. 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