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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170125 to 170201


여행 포토북을 만든 사진 위주로 업로드하였으며 모든 권리는 미 마이셀프 앤 아이, 오로지 나에게 있음.




Day 5


여행 중 처음으로 느지막히 일어난 날.



내가 묵은 호스텔은 조식 시간이 아침 10시까지였는데도 단 하루도 그 조식을 먹은 날이 없다. 다섯째 날은 그 전날 하도 돌아다녀서 피곤한 나머지 조식 시간이 다 끝나갈 때에야 겨우 비척비척 일어났다.


결국 공짜로 먹을 수도 있는 아침식사는 숙소 근처 키사텐에서.

숙소 근처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이 키사텐은 그동안 오며가며 늘 궁금했던 곳이었지만 밖에서는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아 들어가도 되는 곳인가, 뭘 파는 곳일까 가게 분위기가 늘 궁금했다. 이날은 가게 앞 입간판에 모닝 세트가 600엔이라고 적힌 걸 보고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의외로 이런저런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체크 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 기모노를 단정하게 입은 할머니,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등등... 꼭 일드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편하게 앉아 담배를 뻐끔뻐끔 피어대며 제각각 늦은 아침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게다가 나비 넥타이까지 맨 웨이터가 둘.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이게 바로 키사텐이다!라는 듯한 첫인상이었다. 내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들어와서 눈치를 보며 쪼르르 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중국인 관광객들 같은, 우리 같은 어중이 떠중이들까지... 어색한 조합이 재미있는 분위기에서 모닝 세트를 시켰더니 진한 커피와 미국식 아침식사가 나왔다.


@Takagi coffee

京都府京都市下京区烏丸通松原上ル因幡堂町711


2,3일 전부터 왼눈이 따끔거리고 아파서 돌아다니는 중에도 몇 번을 눈을 비비고 안약을 넣었다. 나아지지 않아서 안과라도 가야 하나 했는데 세수하며 보니 속눈썹이 눈 안쪽에 쏙 들어가 있었다. 무려 30분이나 눈썹과 사투를 벌인 끝에 이겼지만 눈 바로 밑에 일어난 새살을 뾰루지인 줄 알고 잡아 뜯은 바람에 눈이 퉁퉁 부어 엄청나게 아팠다. '안과에 가야 하나, 피부과에 가야 하나? 일본어로 쓰리다는 말이 뭐지? 여행자 보험으로 병원비 커버할 정도는 되나?'. 토스트 반, 담배 연기 반인 아침식사를 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타카기 커피의 모닝 세트로 든든히 속을 채우고 오하라로 출발. 숙소가 있는 가라스마 마츠바라에서도 바로 오하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잠시 볼일이 있어 가와라마치에 들렀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오하라로 가는 사이 한 시간 정도가 훌쩍 지났다. 오하라로 갈 때는 미리 사 둔 교토 패스 1일권을 이용했다. 교토 버스 1일권과 함께 샀더니 JR 버스터미널 직원이 "이건 교토 버스 1일권이 아니라는 거 아시죠?"라고 되묻더라.



정식 터미널이라기 보다는 버스 차고지 같았던 오하라 버스 정류장


12시 넘어서야 도착했더니 오전에 오하라를 둘러본 사람들이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딱 봐도 시골


오하라로 들어오는 버스 길은 산골 마을 찾아가는 듯 높이 솟은 산봉우리 사이로 구불구불 휘어지고 좁아졌다.

이날은 날씨가 흐려 오후에는 비와 눈이 번갈아 내렸는데 다가올 비구름을 예고라도 하듯이 산봉우리 허리에는 안개 구름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나름대로 운치 있었다.

다만 산이 낮고 오밀조밀해서 압도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일본의 자연 경관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이 나라의 자연 경관은 꼭 신선 놀음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비롭거나 웅장한 멋은 없는 것 같다. 나름대로 소박하고 친근한 인상은 있을지언정... 반면에 3일 남짓한 시간동안 여러 곳을 둘러보며 나는 일본인은 작은 것 하나도 최선을 다해 완벽에 가까워질 때까지 다듬고 꾸민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오하라로 들어오며 그런 일본인의 특성이 그들의 자연 풍경과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고요하고 단정한 오하라였다.







오하라는 교토 시내에서 멀고 꼭 봐야 할 명소가 있다고 할 수는 없어서 의외로 교토를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오하라를 찾는 이는 드문 듯 하다. 하긴 교토도 오사카를 여행하면서 당일치기로 잠깐 다녀가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하지만 이곳에서 찾은 평화로움은 이번 교토 여행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산젠인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절임 음식인 쓰케모노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상점 사이에 서 있는 오하라메상. 고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옛 수도 교토와는 달리 오하라는 소박한 산촌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교토에서 살지 못하는 사정이 있어 밀려난 귀족이나 여러 이유로 숨어들어온 사람들이 주로 살던 곳이라고 한다. 오하라메는 '오하라 여자'라는 뜻으로, 이런 어려운 사정에서도 나무를 해서 그 단을 이고 교토까지 걸어와 팔던, 억척스럽지만 생활력 강하고 착실한 당시의 오하라 여자를 상징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내가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온 그 길을 걸어서 왔다갔다 했을 여자들을 생각하니 왠지 뭉클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제주도 해녀들이 떠올랐다.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산젠인부터 찾아갔다. 건물 안을 둘러보는데 사람들이 창가에 정자세로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500엔에 맛차와 과자를 사서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기에 안내인에게 차를 마시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초록색 표를 하나 주고 기다리라고 했다. 어느 부부 옆에 앉아 카메라 렌즈를 잠시 손 보고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찍었다.



내가 여행 오기 2주 전쯤, 1월 교토에 눈이 굉장히 많이 내렸다고 한다. 분지 지역이라 고온 다습한 교토에서는 보기 드문 폭설이었는데 그 덕에 눈 쌓인 금각사의 풍경이 절경이라 궂은 날씨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쯤에는 이미 눈이 많이 녹아 보기 힘들다는 그 절경은 못 보았지만 오하라에는 아직도 이렇게 눈이 쌓여 녹을 줄 모른다. 내가 본 이 눈이 1월 교토에 내린 그 눈이 맞으려나. 교토 북쪽에 있어 오하라는 춥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확실히 훨씬 추워서 밖에서는 내내 장갑을 벗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 풍경이 아담하고 차분해서 잠깐 바깥 마루에도 나가 보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산젠인은 이끼 정원이나 슈헤키엔 등 관상 정원으로 유명하단다. 눈이 덮여 이끼는 못 보았지만 눈 내리고 살얼음 낀 모습도 보기 좋았다.


양갱은 처음 먹어보았는데(한국에서도 먹은 적이 없다) 쌉쌀한 맛차를 달달하게 중화시켜 주었다. 옆에 앉은 부부는 남편의 직장 동료 간의 불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외국인인 티가 많이 났나 보다.


점점 듣기 거북해져서 차를 마시자마자 일어나서 복도를 따라 걸었더니 법회가 열리는 왕생극락원이 나왔다.



안에는 본존불이 있어 앞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가 나왔다. 건물을 빙 둘러보지는 않았다. 안에 앉아있던 스님이 너무 무섭게 생기셔서...






자갈길을 따라 왕생극락원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관음당까지 올라갔다.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어떻게 힐 부츠를 신고 저 길을 다 걸었는지...



산젠인 관음당



산젠인


산젠인은 출구로 나오는 길도 길었다. 나오는 길에 펼쳐지는 풍경은 꼭 사람 하나 없이 그려 벽에 걸린 족자 같다.


입장료 700엔에 차 값 500엔, 무려 1,200엔을 한꺼번에 쓴 산젠인에서 나와 호센인으로 향했다.



액자정원으로 유명한 호센인은 산젠인에서 나와 좁은 길을 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오래된 가옥 같아서 지나칠 뻔 했다. 문 옆으로 '호센인' 간판을 건 매표소가 없었으면 호센인이 어디냐며 한참 근처를 뱅뱅 돌 뻔 했다. 여기가 호센인 맞나요? 무려 800엔짜리 표를 사며 물었더니 맞다고 한다.


호센인의 입장료에는 안에서 마실 수 있는 차와 다과 값도 포함되어 있어서, 들어가자마자 호센인 안내인이 반겨주며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있으면 차를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다. 안내인이 준 팜플릿을 읽으며 액자정원 정면에 앉았다. 내가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없어 아무 곳에나 앉을 수 있었다.



풍경 양쪽에 기둥 두 개를 세워 풍경을 방 안으로 끌어들인 호센인. 일본 정원 특유의 인공미가 극에 달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방 안으로 끌어들인 풍경 속으로


조금 기다리니 안내인이 차와 다과를 들고 돌아왔다. 자리에 앉기 전 한참을 호센인에 대해 설명하고 정원을 감상하는 법을 알려주더니(간단히 요약하자면 '자유롭게 감상하시라'는 것...) 차와 다과는 내려놓자마자 자리를 떴다. 내가 들어오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거든. 항상 내가 빈 가게에 들어가면 꼭 다른 손님들도 들어오는 것 같은데 그냥 기분 탓인 걸까, 아님 정말 내가 무슨 장사 수호의 신이라도 되어서 그런 걸까. 다행히도 호센인의 고요한 분위기와 그림 같은 액자정원에 사람들도 조용해져서 다들 도란도란 이야기만 주고받을 뿐 다른 사람의 감상을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카메라 고수의 향기가 풀풀 풍겼던 세 남자


두 사람이 액자정원 사진을 찍으려고 하길래 슬쩍 옆으로 비켜주었더니 남자 쪽에서 눈으로 인사했다.

뭐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인사를 받으니 괜히 쑥스럽네.



액자정원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던 건 호센인 건물의 천장이었다. 예전 후시미 성에서 전투에 진 사무라이들이 300명 넘게 할복했는데, 그때 그들이 흘린 피로 칠갑을 한 성의 나무 바닥을 떼어다가 이곳의 천장으로 삼았고 호센인에서 그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고 한다. 차를 마시며 안내인이 준 팜플릿에서 이걸 읽다가 놀라서 고개를 드니 정말 천장이 붉은 갈색이다. 피로 젖어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마르면서 그 자체가 핏자국이 된 나무 천장 아래 앉아있다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팜플릿에 놀라 안내인에게 물어보았더니 할복 자살하는 폼까지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 적갈색의 나무 천장에는 당시 죽은 사무라이들의 다리나 눈 자국이 남아있다며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그 자국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의 팔이나 목처럼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로만 들어도 소름 끼친다. 아니, 명복을 비는 방법도 여러 가지일텐데 왜 그 나무 바닥을 떼어다가 천장에 붙였대요...?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이런 데서 느껴지는 일본과의 거리감이란.


호센인


명망 높은 오랜 사찰이긴 한 듯, 건물 안에는 일왕 부부가 젊은 시절 이곳을 방문한 모습을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사방이 뻥 뚫린 곳에 앉아있으려니 엉덩이도 시리고 발도 더 얼어서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 어느 정도 사진을 찍고 나왔다. 날이 조금 따뜻했으면 더 오래도록 있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네.



호센인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려면 산젠인 앞을 다시 지나게 된다.


다리를 건널 때쯤 산젠인 쪽에서 "팡!" 하고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나고 산젠인 앞 기념품점과 식당 사람들이 뛰쳐 나오길래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고 덩달아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산젠인 고텐몬에 쌓인 눈이 녹으면서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식당 아주머니가 고텐몬 앞 계단을 넓게 덮은 눈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가스 폭발이라도 난 줄 알았네. 문 아래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산젠인으로 가는 오르막길 어귀에 있는 이름 없는 밥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서 오야꼬동을 시키고 자리에 앉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가게 안이 많이 춥다며 주방에서 달려나와 코타츠의 콘센트를 꽂아주었다. 기대도 안 했던 코타츠 체험을 했는데 정말이지 일본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뼛속까지 덥혀준다고 할까. 이래서 노다메가 코타츠 안에 들어가서 몇날며칠을 안 나왔던 거구나.


우리나라보다는 따뜻하다지만 일본에서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그럼에도 어디를 가든지 난방 기구라고는 전열기나 히터 뿐이었다. 덥고 탁한 그 특유의 난방 방식은 온도 조절도 잘 안 될 뿐더러 은근히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구석이 있는데 그런 일본에서 코타츠는 정말... 신세계였다. 일본인이라면 자랑스러워 할 만한 물건이다.


그래도 온돌만큼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조신하게 미소시루까지 마시니 몸이 사르르 녹는다 녹아.

그나저나 오야꼬동은 언제 들어도 정말 무시무시한 이름이야.


밥을 다 먹고도 한동안 코타츠 안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있었다. 언 발이 조금 녹았다 싶었을 때에야 맛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가게를 나섰다. 오하라에서 꼭 보아야 할 세 사찰 중 잣코인이 아직 남았기 때문. 한데 모여있는 산젠인, 호센인과는 달리 잣코인은 정반대 방향으로 20분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 잣코인 방향으로 한참 걸었다. 가는 길 양쪽으로는 오하라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집이 죽 늘어서 있어서 가던 길에서 문득 되돌아보면 산골자락에 눈 쌓인 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꼭 어느 강원도 시골인 양, 낯설지가 않았다. 꽤 정겨운 시골 마을이었다.



잣코인은 뇨인(황태후나 황후, 이에 준하는 신분의 여성)의 한거 어소이다. 이곳은 천태종의 비구니사로, 594년에 쇼토쿠 태자가 아버지 요메이 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하였다. 본존은 쇼토쿠 태자의 작품이라고 하는 로쿠만타이 지장존이다. 

제 3대 겐레이몬인 도쿠코(다이라노키요모리의 여식, 다카쿠라 일왕의 황후로 안토쿠 일왕의 국모)는 적광원에 세 번째로 산 스님으로 1185년 9월에 출가. 겐페이 전쟁에서 패하여 단노우라에서 멸망한 다이라 가문과 아들 안토쿠 천황의 명복을 빌면서 평생을 이곳에서 지낸 한거 어소이다.


잣코인 공식 팜플릿에서


안토쿠 일왕의 어머니 겐레이몬인이 멸문한 친정 타이라 가문과 아들의 명복을 빌었다는 잣코인. 혼자가 된 지체 높은 여자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에는, 글쎄 이런 표현 조금 이상하지만, 안성맞춤이었다. 조용한 오하라에서도 안쪽 깊숙이 들어가 자리하고 있어서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모를 곳이었다.



본당으로 가려면 사방정면연못 위 복도를 지나야 한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쯤 본당 안에서 수행자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나왔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와야 한다길래 신발을 벗는데 문제는 내가 본당 마루까지 신발을 신고 올라갔다는 것... 난 거기서 벗으라는 줄 알았지ㅠㅠ 그분이 하도 기겁하길래 나도 당황해서 허둥지둥, 몸짓이 마구 꼬였다. 그래도 목소리 한 번 안 높이시고 신발 벗는 법을 알려주길래 다시 돌아가서 신발을 벗고는 본당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신고 들어갔던 곳을 발로 한 번 슥 문질렀다.


잣코인


수행자와 나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은 본당 안에서도 이어졌다. 잣코인 본당 안에는 쇼토쿠 태자가 만든 높이 2.5m의 지장보살입상이 공간을 가득 메운 채 서 있었다. 본당과 불상이 주는 경건한 분위기에 취했는지 아니면 그 안을 꽉 채운 향내에 취했는지 나도 얼떨결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드리는 척 했는데, 눈을 뜨고 멀뚱멀뚱 앉아있으려니 수행자가 빨간 실을 손에 쥐여주었다. 이 실을 잡고 있으면 부처님과 손을 잡고 있는 거라나. 실을 거꾸로 되짚어 훑어보니 과연 불상의 손목에 내가 잡은 실이 묶여 있었다.


'아, 그러면 이 실로 악수도 할 수 있는 건가?' 부처님이랑 악수라도 하는 줄 알고 무심코 실을 슬쩍 당겼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 세게 당겨야 하나 싶어 더 당겨도 내가 잡은 실 반대쪽의 무언가는 꼼짝도 안 한다. 힘 자랑이라도 하듯이 더 세게 당겼더니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수행자가 다시 한 번 기겁했다.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고 손까지 내저으며 말리길래 또 당황해서는 "으아! 부처님 죄송해요!"라며 실을 툭 떨어뜨렸다. 수행자가 다시 한 번 웃길래 그나마 다행이었다.


민망해져서 불상 앞에 가득 놓인 빨간 액세서리 같은 것을 괜히 하나 집어들었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오마모리(부적)이라고 한다. 뭘 지키냐고 다시 물었더니 "자신의 미가와리를 지켜준다(みがわりる)"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미가와리가 뭐냐고, 다시 말을 새로 배우는 아이처럼 연이어 물어보았다. 수행자가 이 외국인한테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이런 곤란한 표정을 짓길래 그냥 잠자코 300엔을 불상 앞에 놓고 부적을 사서 들고 나오기로 했다. 미가와리라는 게 뭔지 알 수 없어도 두 번이나 실수를 하고 났더니 문득 죄송해져서(누구에게...?)... 나오는 길에 미가와리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더니 '대역'이라는 뜻이었다. ...나의 도플갱어를 지켜준다는 뜻인가? 일어 전공자인 친구에게 물어보아도 그냥 널 지켜준다는 뜻이겠지라고만 한다. 대체 뭘 지킨다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지갑 안에 그 조그만 부적을 넣어 다닌다. 내가 아니라도 내 도플갱어라도 지켜주겠지, 뭐 이런 생각으로.


잣코인 출구 쪽에 있는 작은 보물전인 호우치쇼덴에는 잣코인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겐레이몬, 타이라 가의 사람들처럼 잣코인과 관련있는 사람들의 편지나 그림이 쭉 전시되어 있었고 한가운데는 2000년 5월 화재로 소실된 잣코인 본당과 지장보살입상에 대한 이야기나 당시의 신문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대강 읽어보니 웬 미친 놈이 한밤중에 불을 질러서 아주 싸그리 불타버렸다고. 기사 사진을 보니 말 그대로 까맣게 불타버렸다. 지금 있는 본당과 지장보살입상은 원형에 최대한 가깝에 복원된 것이고 지장보살입상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하마터면 그런 아픈 역사가 있는 일본 문화재를 자빠뜨려서 또 복원시키게 할 뻔 했다. 한 번 불에 탔던 불상을 또... 무지막지한 관광객 같으니.



10분 정도를 기다려 교토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스산하게 내려서 마을이 더 운치있어 보였다.




오하라는 마냥 조용한 마을인 줄로 알았더니 돌아오는 길에 웬 등산객 무리가 우르르 올라탔다.

등산복이 하도 요란하고 화려해서 우리나라 분들이 여기까지 산 타러 오셨나, 오를 산도 없어 보이는데 했더니 의외로 일본 사람들이었다. 

어쩜 이렇게나 알록달록 화려한 등산복이라니...


슬슬 여행도 끝나갈 때였지만 아직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버스나 기차 표도 사지 못했다. 간사이 여행에서 많이들 사는 이코카 카드도 없어 하루카 표는 어느 정도 할 지 궁금했다. 전날 자기 전에 한참 웹서핑을 했지만 이코카가 없는 사람의 하루카 구입에 대해서는 설명한 블로그나 정보가 없어서 결국 직접 알아보러 교토역까지 가기로 하고 마음놓고 버스 안에서 졸았다. 어차피 종점까지인걸.




교토역은 처음 와 봤을 때도 그랬지만 몇 번을 와도 그 거대함이 놀랍다.

하긴 버스 터미널, 기차 역, 백화점, 호텔이 다 붙어있는 곳이니 오죽하겠어.


용케도 교토역에서는 헤매지 않고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하루카 발차 시간과 가격을 물어보니 JR 직원이 친절하게 표를 보여주며 한참을 설명해 주었다. 역시나 이코카가 없으면 하루카는 한참 비싸다. 그것도 지정석이 아닌 자유석 주제에... 결국 비슷한 가격에 마음놓고 앉아서 갈 수 있는 게이한 리무진을 타기로 하고 인포메이션 센터를 미련없이 떠났다.



당장 게이한 리무진을 예약하러 갈까 하다가 하치조구치까지 걸어가야 하기도 하고 리무진 예약 창구도 일과를 끝냈을 시간이라 나중에 가기로 하고 돌아서서 나왔다. 밖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직 6시 밖에 되지 않아서 어디를 가야 할까 고민하는데 눈앞에 교토 타워가 보였다. 교토 타워나 올라가 볼까.



@JR Kyoto Station



Kyoto view in the rain from the Kyoto tower


700엔이 넘는 입장료를 주면 교토 타워를 단숨에 올라가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오하라 사찰들을 둘러보느라 입장료로 한바탕 돈을 썼지만 넉넉하게 시간도 때울 겸 아낌없이 또 돈을 썼다. 막상 올라가서 본 야경은 쏘쏘했지만.


교토 타워에서 내려다 본 교토 역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왜 그랬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국제전화 비싸다며 확 끊고는 바로 후회했다. 해외에 나갈 때마다 내 안부가 궁금한 우리 집은 곧잘 전화를 하는데, 한창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통에 그 전화를 받으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오늘은 뭘 했고 어디를 갔다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래도 밖이라 정신없다고, 국제전화는 돈이 많이 드니 카톡으로 이야기하자고 좋게 좋게 말하면 될 것을... 유독 예민해져서 무례해지는 날이 있는데 이날이 딱 그랬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잘 들리지도 않는 전화를 받는 건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은데 어떻게 감히 창조주에게 그런 막말을 할 수 있담. 바로 반성하고 죄송하다고, 그럭저럭 다닐 만 하다고 카톡을 하고 사진도 몇 장 보냈다. 조용한 마을에서 보낸 대여섯 시간이 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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