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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종의 기원], 2016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정유정 작가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도서 사이트에서는 [종의 기원] 초판본은 작가 사인이 담긴 양장본이라며 예약 구매를 유도했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정유정의 신간인데?


[7년의 밤] 이후 이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오른 나는 주저하지 않고 책을 주문했다. 양장본이 싫어 예약하지 말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유정의 신간인데.


뭐 아무튼. 이렇게 작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책을 구입했고, 짬짬이 읽어 이틀 만에 읽어내렸다.


나는 문학 작품을 철학적 관점, 사회학적 관점 등등 고차원적으로 분석할 소양이나 도구는 없다. 대신 재미있게 읽었던 [7년의 밤]과 비교하여 감상평을 말해보자면, 재미나 스릴 면에서는 [7년의 밤]이 더 낫다.


아직 정유정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나, 이 작가는 처음부터 판을 벌려놓고 이야기를 쓴다는 생각을 했다. [7년의 밤]에서 독자는 영제의 아이를 치어 죽인 게 현수라는 걸 알고 있고, [종의 기원]의 주인공 유진이 어머니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잠에서 깨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이미 알고 있다. 대표작과 신작 모두 이야기에 반전은 없지만, 정유정 작가가 쓰는 이야기는 지루하기는커녕 밤을 새서라도 기어코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읽게 만든다. 그 힘은 반전 같은 이야기 구성의 기교보다도, 너무나도 생생하고 치밀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서 나온다. [7년의 밤] 현수와 영제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활자 위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고, [종의 기원] 유진의 상황 파악은 현실 상황는 정반대로 너무나도 침착하고 정연하여 더욱 소설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숨 쉴 틈도 없는 혹은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운 감정선에 휘말려서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7년의 밤]이 마치 음속으로 질주하는 듯한 독서 경험이었다면 [종의 기원]은 자근자근 한 발씩 밟아 나가며 읽게끔 하는 책이었다. 두 소설에는 모두 악인이 등장한다. 영제와 유진 (헐 초성이 둘 다 ㅇㅈ... 의도하신 건가여?!) 작품에 극도의 긴장감을 불어넣게 하는 존재로서 완벽하게 기능한다.

다만 영제의 경우 그의 얼음 같은 성격과 그럴싸한 외관에도 절대 가까이 해서 좋을 일 없는 악인이라는 게 글 밖에서도 느껴졌다면, 유진은 조금 달랐다. 유진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제만큼의 절대악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절대악에 동요한 셈이니 나도 사..사이코..?ㅋㅋㅋ


그렇다기보다는, 결국 책 속에서는 유진은 나 그 자체인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쨌든 타인의 눈에 보이는 '나'의 선악은 과정이 아닌 결과로 판단되기 마련이다. 영제 개인의 사연이나 핑계도 그의 관점에서 아주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정 폭력과 부부 성폭행, 아동 학대 등등 도저히 맨정신인 멀쩡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온 것을 영제가 아닌 내가 영제 밖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의 사연을 고려할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반면에 유진은 그의 깊은 속내에서부터 살인의 원천인 그가 어머니를 애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애증이라는 감정을 가졌는지도 의문이지만)에 얽힌 사연을 구구절절 들었기 때문에 불편하면서도 그를 절대악 아니라고 착각한 것도 있을지 모르겠다. 뒤로 갈수록 살인을 정당화하는 듯한 유진의 말이 그저 한줄한줄 잘 쓰인 궤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뭐 이런 면에서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인과 관계와 사람들 간의 심리 묘사로 스릴이 극대화된 [7년의 밤]에 비해 [종의 기원]은 조금 심심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한다. 악인의 관점에서 악인을 보다 보니 한자한자 더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하지만 속도감은 떨어져도 더 깊고 진하게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아, 너무 깊게 들어가진 마시고. 유진에게 현혹당할 수도 있으니ㅋㅋㅋㅋ (곡성 한 번 더 보러 가야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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