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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4 mon voyage en Europe

#Rev10 땅을 딛기 위해 필요한 것_Day 9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쪼개서 써야지.


아무래도 런던 이야기를 (또) 해야겠다.


2011년, 런던을 여행할 때의 이야기다. 그때의 나는 "나 유럽 가야겠어"라고 말하고는 겁도 없이 생애 첫 해외 여행을 혼자 떠난 '알 수 없는' 아이였지만, 역시 혼자 하는 여행은 해 본 적이 없어 런던에서 함께 다닌 동행들에게 꽤 의지했다.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기댔다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게 3일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기약 없이 떠났을 때 내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2011년 여행기 런던 편에 아주 생생하게 나와있다.


그때 나는 여행하는 사람의 일상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깨닫고 급격한 불안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적이 없고, 태어난 곳에서 줄곧 자라 지금도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친구들이 지척에 있으니, 살고 있는 곳에서의 연고도 확실하다. 그러니 잠시 머물다 떠날 도시에서 시간을 보내고, 일상 속에서 뭐 하나 나를 붙잡거나 내가 붙잡을 만한 게 없는 경험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애송이였던 내가 무엇 때문에 눈물바람으로 리젠트 파크를 돌아다녔을지는 대강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3년이 지나 2014년의 나는 한층 단단해져 있었다. 단단해졌거나 둔해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여행이 아니라도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인연은 있기 어렵다-그러니 그런 게 생기거든 소중히 여기라-는 말을 이해한 때였다. 주위에서 '시니컬하다'고 평하는 성격이 비로소 빛을 발휘하면서 적당히 나를 보호해 주기 시작한 무렵이기도 했다. 그러니 오스트리아에서도 외롭다며 울지 않고 잘 돌아다녔고, 되려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말을 걸어 나 자신도 있는 줄 몰랐던 내 친화력을 발견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파리에 온 지 2일차, 나는 제법 익숙한 도시에 와 있으면서도 3년 전 그때 그 꼬맹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익숙한 동네에 머물고, 이 나라 사람들의 말을 할 줄 알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빈과 할슈타트에서는 여러 가지 처음 보는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파리처럼 익숙한 곳에 혼자 있으려니 다시 내 관심사는 내 안으로 향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익숙한 곳에서 혼자임을 뼈 저리게 깨달으면서 다시 외로움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파리에 대한 나의 증오(?)가 시작되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하면서 "아오 이놈의 파리... 아오!!!"라며 말로만 투덜거리는 척 했지만, 내 안의 나는 파리를 싫어하는 감정이 끓어 넘치다 못해 '하필이면' 파리행 비행기 표를 산 나 자신까지 들들 볶고 있었다.

아마 이때 M씨가 없었다면, 그리고 파리에서의 두 번째 날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인천으로 가는 에티하드 비행기를 타려고 별의별 수를 다 썼을 것이다 (교외 당일치기도 생각해 봤지만 프랑스 기차 표는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더라).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린 M은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졸업을 앞두고 여러 가지 생각으로 바쁠 터에 유럽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첫인상부터 쾌활하다 싶었는데, "파리에서 만날 사람들이 있어서 가끔 함께 다니기 어려울 수 있다"는 내 말에도 쿨하게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씩씩하게 혼자 몽마르트에도 다녀오더라. 긍정적이고 당찬 모습에 감탄해서 "그렇게 혼자 다녀도 안 외로워?"라고 물을 정도였다.


파리에서의 둘째 날은 M과 함께 시작해 보기로 했다. 파리에 처음 온다는 M을 위해 역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에펠탑이었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챙기고, 우리는 숙소에서 가까운 마레(Le Marais)부터 가 보기로 했다.


숙소 앞에서 바로 탈 수 있는 27번 버스는 파리 동남부와 북서쪽에 있는 생 라자르 역 사이를 오가면서 팡테옹, 뤽상부르, 루브르 등 파리의 명소들을 지난다. 파리 시민들에게는 마을 버스 중 하나겠지만 관광객으로서는 투어 버스 대신 탈 수 있는 관광 최적화 버스인 셈이다. 우리도 이 버스를 타고 생 미셸에서 내렸다.


생 미셸에서 마레까지는 조금 걸어야 한다. 시테 섬 근처를 걷다가 문득 우표 생각이 나서 우체국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았다고 지금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할 수 있는 빈이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우체국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물론 내 눈에 안 띄었던 거겠지만. 여행지에서 엽서를 써서 나 자신과 가족, 절친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나로서는 우표와 우체통이 간절했는데 빈에서는 우체국은커녕 우체통도 찾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할슈타트에서 산 엽서를 파리에 와서 부쳤겠냐고.


프랑스 우체국(La Poste) 직원이 준 영수증을 보니 그날 우표를 산 시각은 오전 10시 40분이었네ㅋㅋ 퉁명스럽긴 해도 그 와중에 알려줄 건 다 알려줬던 친절한 직원에게서 우표 두 장을 샀다. 총 1.96유로. 그때는 오, 싸네라고 생각했는데 원화와 유로화의 단위가 다르다 보니 드는 착각이었다.


우체국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내가 불어를 엄청 잘한다고 오해(?)한 M을 데리고-난 그냥 '우표'가 불어로 뭔지 물어봤을 뿐이고 직원은 "un timbre"라고 알려주는 대화였는데ㅋㅋㅋ-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파리 시청사에 도착했다.



화창했던 전날과는 달리 몹시 우중충했던 날.


시청사 건물은 1871년 파리 코뮌 때 불탔으나 1882년에 복원되었다. 당시 불타고 남은 돌을 가져다 복원 작업에 그대로 썼다고 하니 건물 자체에 파리 시청의 시간이 배어있는 셈이다.

시청사 파사드 외벽에는 유명한 파리지앵들의 조각상이 서 있는데 서울시도 서울 출신 위인들의 조각상이나 사진을 쭉 걸어놓았으면 어땠으려나.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들은 시청사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절로 공부가 될 듯ㅋㅋ



웅장하고 멋진 건물이었지만 건축 지식이나 역사 지식은 없는 우리는 오뗄 드 빌을 지나쳐 마레를 향해 계속 걸었다.



마레, 파리 문화의 중심.


아기자기하고 예쁜 갤러리를 기대했지만 의외로 볼 게 없었다. 토요일이었거든. 그래도 그 와중에 이것저것 구경은 좀 했다. 찻집에 들어가서 괜히 시음도 해 보고. 난 맛있었는데 M은 몇 잔 마시다가 "생각만큼은 아니네"라며 나가자고 했다. 점원한테 좀 미안하더라만, 나도 예전에 쿠스미 티를 샀다가 여간 실망한 게 아니어서 빈손으로 나왔다. 미안.


그러다가 MAZET라는 이름의 초콜릿 가게에 들어갔는데.

너무도 당연히, 아니 거의 의심도 하지 않고 프랑스인 점원이 있겠거니 했는데 뜻밖에도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를 맞은 건 검은머리 아시아 여자 둘이었다. 가게에 들어서기 전 나에게 "Bonjour"의 제대로 된 발음을 배운 M은 그 말을 써 먹어보겠다며 웃으며 문을 열었는데... 이게 뭐영. 의외의 점원과 의외의 손님을 맞은 네 여자가 멈춰서서 서로 멀뚱멀뚱 보던 광경을 떠올리니 또 웃음이 난다.


잠시 멈춰 서 있던 M이 "봉쥬"라며 인사하자 가만히 우리를 보고 있던 점원이 좀더 직급이 높아 보이는 여자 쪽을 향해 "도오시오"라며 난감해 했다. 그걸 보고 "아, 일본 분이세요?"라고 말을 걸었다. 당황스러워 하던 그 얼굴이 반가움으로 반색하던 그 순간이란ㅋㅋㅋ


가게는 손톱만 한 크기의 초콜릿이 진열되어 있었다. 윌리 웡카의 가게보다는 좀더 멀쩡하고 세련된 가게였지만, 초콜릿의 종류가 어찌나 다양한지 여기가 마레 버전 윌리 웡카 가게인가 생각했다. 이름만 보고는 맛이 상상이 안 되어서 시식 좀 해 봐도 될까요, 물었는데 점원이 흔쾌히 손에 초콜릿을 하나씩 올려주었다. 오, 맛있어. 이건 뭐에요, 저건 무슨 맛이에요, 하나 먹어봐도 돼요? 일어로 하나씩 물어보니 그때부터는 매니저와 점원 모두 마음 놓고 일본어로 대답했다.


M은 이 초콜릿이 마음에 든다며 한 움큼을 샀다. 초콜릿에 돈을 쓸 생각이 없던 나는 그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저 초콜릿도 맛 봐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었는데 매니저가 아예 네다섯개를 간단히 포장해서 주었다. 그러면서 어디서 일본어를 배웠냐고 물었다. 그냥 영화 보면서 알게 됐어요 연예인 덕질하면서 깨쳤다고는 말 못 하지라고 대답했더니 "스고이"를 연발했다. 그리고 이 초콜릿은 그냥 줄테니 받아가란다.

깜짝 놀라서 "저 돈 없는데"라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지갑을 꺼내니 "괜찮다"면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그러니 그냥 가져가라고 말해 주었다. 이 사람들, 자기들 말고 일어를 쓰는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못 만났던 걸까? 그 말을 들으니 왠지 가슴이 찡해졌다. 내가 지금 이 사람들 걱정할 때인가, 그리고 난 일본인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 만나서 좋네요"라고 말했더니 매니저와 점원이 생긋 웃어 보였다.


어쨌든, 일어 좀 했다는 이유로 돈 안 들이고 M이 산 것만큼 초콜릿을 먹게 됐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더니. "아리가또"를 몇 번 말했는지 모르겠다. 가게를 나서서 M이 산 초콜릿은 넣어두고, 생각지도 못하게 얻은 초콜릿을 사이 좋게 나눠 먹었다.



안경 쓴 생쥐가 유재석을 닮았어.


옆에서 M이 초콜릿 시식평을 늘어놓는데, 맞장구는 쳐도 사실 그 말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MAZET의 점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파리는 대체 어떤 곳일까. 어차피 일주일도 안 되어서 다시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갈테지만, 막상 내가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보니 문득 그녀들의 파리 생활이 궁금해졌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삶일까, 계속 생각하면서.


이 만남이 있고 며칠 후 나는 다시 이 가게를 찾았다. 찾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M은 그런 대로 마음이 맞고 믿을 수 있는 동행이었지만 일주일 가까이 이어지는 파리 탐방을 내내 함께 할 정도로 마음이 맞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는 처음 이틀은 함께 다니다가 3일째 되는 날부터는 각자 다니고 싶은 대로 다녔다. 둘 다 쿨하게 동의한 일이지만 자유로운 여행이라고 외로움에서 자유로운 것까지는 아니었다.


마레를 다시 찾아 걸음이 닿는 대로 쏘다니던 나는 문득 MAZET의 초콜릿이 생각났다. 쌉쌀한 코코아 가루를 뒤집어 쓴 아몬드 초콜릿이 맛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큰 도시에 내가 아는 곳, 내가 가 본 가게가 있다는 게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한 번만 더 가면 왠지 당당하게 단골이라고 (내 마음대로)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가게.


이번에 가면 초콜릿을 사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초콜릿 진열대에 가서 괜히 이것저것 뜯어 보는데 카운터 뒤에서 예의 매니저와 점원이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른 척 하다가 "이거 주세요"라고 말을 거니 그제야 눈이 동그래지면서 점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지난번에 오셨죠, 저희끼리 전에 왔던 손님인가 하고 얘기하고 있었어요라고 한다.


또 와서 반갑다고, 내가 산 초콜릿 말고도 약간의 초콜릿을 더 맛 볼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일본어를 하는 사람을 만나니 반갑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왠지 붕 떠 있던 내 마음이 비로소 땅에 닿는 듯 했다.


숙소를 함께 쓰고 말이 유창한 사람이 있어도 어쨌든 이 넓은 도시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도, 뭔가 추억할 만한 걸 공유하고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여행 중 만난 교수님이나 선배 동기 후배는 제외하고.

그러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 두 외국인이 나를 알아보고 먼저 반갑다는 말을 해 주다니...


초콜릿이 맛있어서인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인가, 말이 통해서인가. 애당초 마제의 매니저와 점원을 아는 사람으로 칭해도 좋은 것일까. 이제는 정말 한 번만 더 만나면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긴 한데, 또 파리에서 볼 수 있을지.

 


구불구불한 마레 지구 골목길을 걷다가 대로로 나오니 생 폴 역 바로 앞이었다.


점심식사를 할 때였는데, M과 나는 아침식사를 느지막히 해서인지 밥 생각은 나지 않았다. 대신 오래 걸어서 조금 피곤하니 어디 앉아서 쉬어가자는 데 합의했고, 생 폴 어느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 한 잔씩 마셨다. 새벽께 비가 추적추적 내리다 만 겨울 파리에서 얼음 동동 띄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게 왠지 웃겼다. 뜨거운 걸 못 먹는 나는 겨울에도 어지간하면 아이스 음료를 마시는데, 그건 세계 어딜 가도 변하지 않는다 하면서. 참 단호한 취향이다ㅋㅋㅋㅋㅋ



생폴 생 루이 교회 (Saint-Paul-Saint-Louis) 앞에서.


카페에서 노닥거리다가 다시 가 볼까,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런 광경이다. 교회 앞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결혼식이라도 했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모인 사람들을 보니 결혼식 하객이라기보다는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 같다. 뭐 하던 사람들일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오래 걸으면 금방 허리가 아파오는 껍데기만 20대인 나를 위해 M은 버스를 타자고 말해주었다. 마레에서 에펠탑까지는 걸어서 가기에는 좀 무리이기도 했고 (전날 걸어봐서...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