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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4 mon voyage en Europe

#Rev8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_Day 7


이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만으로 2n살이 된 생일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그것도 외국에서 맞는 생일이었고, 내 기준으로 유럽에서 가장 로맨틱한 두 도시에서 맞는 생일이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내 생일이라 특별한 날이었다.


생일이라 함은 본디 특별한 날이긴 하지만 나는 유독 내 생일 챙기기에 민감하다. 어린 시절에는 겨울방학이 한창일 때 생일을 맞다 보니 학교 친구들의 축하를 받을 일이 거의 없었고 (그 흔한 생일 파티도 한 번 했어ㅠㅠ), 무엇보다도 내 생일과 외할머니의 음력 생신이 같아서 집에서도 할머니 생신을 먼저 챙기지 나는 뒷전이 되어버렸더라...하는 슬픈 이야기 때문이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던가, 엄마가 깜박 잊고 미역국마저 끓여주지 않아 하루종일 토라져 있던 적도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생일에는 다른 건 안 먹어도 미역국은 꼭 먹어야 하는 슬픈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 대비 쇼핑을 할 때에도 가장 먼저 챙겼던 게 인스턴트 미역국이었다 하하. 이날 아침식사는 전날 밤 꺼내둔 인스턴트 미역국을 든든히 챙겨 먹기로 했다.

이른 아침이라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주방에서 혼자 미역국을 끓여 먹으며 생일을 자축하려니 어쩐지 내가 봐도 좀 짠했지만 아무렴 어때. 게다가 오늘은 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아닌가. 이렇게 특별한 날이 근래 있었던가?


할슈타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다시 돌아온 빈을 싫어했지만, 전날 저녁 제체시온에 다녀와서 반성했다. 이렇게 멋진 도시를 내가 왜 미워했지? 게다가, 일주일 가까이 있었는데도 아직 이 도시에는 볼 것도 갈 곳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아있었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며(?) 다닌 탓도 있지만 동시에 빈이 그만큼 깊고 멋진 도시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특별한 하루를 어디서 어떻게 써야 하나, 전날 밤 무척 고민했다. 다들 아름답다고 하는 쇤브룬 궁과 볼거리가 많다는 빈 미술사 박물관 사이에서 어찌나 갈등했는지. 이른 오후에는 무조건 공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반나절을 어떻게 써야 후회하지 않을까 계산하느라 머리 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는 의외로 단순하게 풀리는 법. 여행을 오기 직전 나는 클래식 감상이라는 고상한 취미에 빠져 있었고, 그 영향으로 몇몇 음반을 샀는데 그 중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쇤브룬 섬머 나이트 콘서트 실황 음반도 있었다. 계절이 완전히 다른 탓에 빈필의 연주가 울려퍼지는 쇤브룬의 여름밤을 상상해 볼 여지조차 없겠지만, 아주 단순히 나는 좋아하는 음반을 녹음한 곳이라는 이유로 쇤브룬에 가기로 결정했다.


쇤브룬에 다녀오자마자 공항에 가려고 미리 체크아웃을 하고, 짐은 호스텔에 맡겨두고 길을 나섰다. 예상보다 칼바람이 매서웠다. 빈은 마지막 날까지 사정없이 춥구나. 여행을 가기 전 대학원 선배가 "겨울에는 중동 유럽에는 가지 마라"고 했는데, 아니나 달라. 전날 장갑을 사러 들어간 가게에서 빈은 언제까지 춥냐고 투덜대는 내 말에 가게 아저씨가 "3월...? 4월 초까지는 추울 거야"라고 한 걸 보면 한국에 비해 기후가 특별할 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추울 수 있냐고.




출근하는 빈 사람들 틈에 섞여 지하철을 타고 한적한 쇤브룬 역에 내렸다. 궁은 역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가야 나온다. 쇤브룬 궁 쪽으로 걷다 보니 이 왕궁을 대표하는 사람들-프란츠 요제프, 볼프강 모차르트, 씨시 황후 등-의 그림이 진열되어 점점 쇤브룬 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티켓을 샀다. 쇤브룬 궁의 방 40개를 볼 수 있는 그랜드 투어 티켓은 학생 할인 13.2유로. 일부러 매표기가 아닌 직원에게 다가가 표를 샀는데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으니 빌리라고 말해 주었다. 오... 엄청 뜻밖인데? 유럽에서는 한국어 듣기가 어려운데, 심지어 무료였다. 이어폰만 있으면 귀에 꽂고 들으며 조용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빌릴 수 있다기에 빌렸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쇤브룬에서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자세히 알려주어 의외로 꽤 알찬 관람을 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생활은 내 생각보다 훨씬 화려하고 더 재미있었다. 오랜 기간 유럽을 통치한 왕가의 위엄이란, 머나먼 외국에서 온 여행자까지 살짝 압도할 정도였다. 그들이 얼마나 검소하지 않은 생활을 했는고 하니, 중국의 귀한 그림을 벽 사면에 모두 붙여 장식한 방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냥 사치스럽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던 건, 자신이 다스리는 제국에 책임을 다했던 황제,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요제프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뜬금없는 비약이려나, 하하.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와 그들의 열여섯 아이들, 그리고 제국 말의 프란츠 요제프와 씨시 황후가 실제 살았을 방을 차례로 지나면서 어쩐지 왕실이라는 컨텐츠가 주는 신데렐라 같은 낭만에 조금씩 빠졌다. 사이보그가 읊어주는 것 같은 한국어 가이드도 꽤 도움이 됐고ㅋ



저멀리 보이는 글로리에떼. 저 너머에 정원이 있을텐데.


그랜드 투어를 하노라면 보통 3,40분이 걸린다지만 나는 그보다는 조금 더 오래 궁 안에 머물렀다. 걷다가 멈추다가, 가이드를 되돌려 들어보기도 하고... 우스운 얘기지만 빈에 와서 줄곧 영어만 쓰고 있으려니 한국어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고 원래 쉽게 산만해져서 이 방에서 일어났을 일-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역사적인 순간까지-을 상상하느라 걸음이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황제의 유일한 상속자이면서도 정당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국의 전성기를 연 통치자로 거듭나기까지 겪었을 매 순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가. 조금 감상을 실어 상상해 보면 머리 속에 긴박하거나 비참하거나 영광스러웠을 그 풍경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시대적 한계성은 어쩔 수 없어도 침착하게 위기를 타개하고 국정을 운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경외심은 품어봄직 하다.


프란츠 요제프와 씨시 황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 쪽이야말로 할 말이 없을 것 같고.


관람 코스의 끝은 기념품 샵이었다. 그곳에서 2013 빈필 섬머 나이트 콘서트 실황 DVD에 마음을 빼앗겼으나ㅋㅋㅋ 몇 번 망설이다가 이내 돌아서서 나왔다. 전날 케른트너의 한 CD 가게에서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CD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돌아섰는데 이번에도...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트랙 리스트가 아니라 그냥 나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샀어야 하나, 아쉬움이 남는다.


궁 밖은 여전히 눈바람이 흩날리고 있었다. 여름 쇤부른처럼 사람으로 북적이지는 않아도, 나처럼 계절은 아랑곳 않고 빈에 온 용감한 사람들이 몇몇 돌아다니며 바깥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혼자 온 나는 열심히 건물 사진, 셀카 사진을 찍다가 연세 지긋해 보이는 동양인 부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손이 얼어서 더 이상 셀카도 찍을 수가 없었어ㅠㅠ).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일본 사람이라 잠깐 서서 대화를 나눴는데, 할머님이 "근데 일행은 없어? 혼자 왔어요?"라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호옹~대단하네"라며 웃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혼자 온 여행에 대해 남들에게 참 많은 감상평(?)을 들었다 하하.


추운 건 둘째 치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글로리에떼까지 가 보는 것은 포기하고 돌아섰다. 느릿느릿 걸었지만 예상보다 쇤부른 관람이 일찍 끝나 포기하기로 했던 빈 미술사 박물관에 가 보기로 했다. 무제움 콰르티어도 마지막으로 들러보고.



이 사진을 찍고 난 직후 내게 다가온 그녀...


MQ 건너편에 있어 그동안 가 보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지만, 이 미술관은 어째 영 내키지 않았다. 빈에 온 첫날 나 홀로 한 비엔나 워킹 투어 중에 그 앞을 스쳐 지나갔으면서도 들어가 볼 생각도 안 했다니까. 어쩌면 빈에서 레오폴트 무제움이나 무막보다도 더한 역사성을 가진 곳인데다 엄청난 명화들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관에 아무 관심이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술에 큰 관심이 없다. 둘째, 미술에 큰 관심이 없다. 셋째, 미술에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 미술관에는 나처럼 무지한 사람도 금방 알아볼 법한 명화들이 즐비하다.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벨라스케스의 [흰 옷을 입은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나 브뤼겔의 [바벨탑]이 있고 루벤스, 렘브란트 등 근대 유럽 회화의 거장들의 그림도 여럿 걸려 있다.



[이를테면 이런 그림 말이에요]


친구 중에 미술 전공자가 있다면, 그리고 내가 그 친구에게 "빈에 갔는데 미술사 박물관 안 들렀어"라고 한다면 엄청나게 혼날지도 모를 곳이었다. 난 유명세에 약하니까 가 봐야지. 게다가 이날은 빈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상징성 아닌 상징성이 내 마음을 움직인 탓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박물관 전경 사진을 실컷 찍고 이제 슬슬 들어가려는데, 두건을 쓴 여자가 다가와 "헤이 헤이" 하며 나를 불러 세우고는 대뜸 다 시들어가는 장미꽃 한 송이를 줬다. 내 깜짝 놀란 표정이 기쁜 표정인 줄 알았나 보다. 여자는 내가 참 예쁘다며ㅋㅋㅋㅋ나더러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었다.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여행을 하며 타인에게 상당히 관대하게 마음을 열고 있던 나는 의심 없이 "응 조금 하는데"라고 말했고... 해맑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여자는 환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돈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ㅋㅋㅋㅋ 뜻밖의 전개에 당황한 나는-순간 자켓 안주머니에서 뒹굴고 있는 5유로 동전이 생각났다- 동전 한 닢이라도 줘야 하나, 1초 고민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니 여자는 친히 본인의 1유로 동전을 보여주며 이런 거 달라고 하고는, 자기 아이가 눈이 아프다며 자기 눈을 연신 가리켜 보이며 10유로만 달라고 했다.


여자 옷차림도 너무 누추하고, 마음도 약해져서 그냥 돈 줘 버릴까 하다가, "텐 유로"를 들으니 정신이 확 들었다. 그 돈을 벌고자 내가 학교에서 진땀 빼며 일한 시간이 떠올랐다. "나 영어 못해"를 아주 분명한 영어로 말하고(콘트라딕션?!) 주머니에 있던 10센트 동전을 꺼내 '너보다 내가 더 가난하다'는 걸 어필하려 애썼다. 그랬더니 생글생글 웃던 여자가 눈빛이 확 돌변해서는 나를 째려보며 저만치 걸어오던 다른 관광객에게 가 버렸다. 내 손에 들려있던 장미꽃을 빼앗아서.


파리에서도 본 적 없는 집시의 구걸을 몸소 겪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나 예쁘다며! 다 돈 때문이었숴?!). 저러다 돈 뜯어내고 말겠지, 싶어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보이는 경비원에게 저 밖에서 어떤 여자가 꽃을 주면서 돈을 뜯어내요, 라고 일렀다. "그런 일 겪게 해서 미안해. 혹시 너 돈 줬니?"라고 물은 경비원은 사람을 보내 저멀리 쫓아내겠다며 안심시켰다. 그 말에 이따 밖에 나가서 해꼬지 당할까 걱정됐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이고, 나는 구걸은 싫어할 뿐이고...


그런데 여행하고 1년 반 후에 유랑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만났다ㅋㅋㅋ 혹시 아이 눈이 아프다고 하지 않더냐고 하니 맞단다. 캬... 거기에 돗자리 펴셨네, 아주.



전시실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 줄 알고 현관만 찍었는데...

아니더라고. 다 사진 찍더라고-_- 문카치의 천장화라도 찍어둘걸.


켄타우로스(야만)를 때려잡는 테세우스(문명)의 조각상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시큰둥하게 관람을 하다가 점점 몰입해서 그림을 여기저기 뜯어보고 가까이서 붓 터치도 느껴보고. 뭐 아무튼, 그림이라고는 1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직관적으로 그림을 감상했다. 실로 다양한 사조의 그림이, 그것도 하나같이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것들이 전부 이 공간에 모여 있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 자체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미술 컬렉션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곳이라고 하는데, 그 권위에 걸맞게 정말 방대한 컬렉션을 모아놔서 기대도 안 했는데 은근 즐거운 관람이 되었다.


아래로 내려오니 아프리카와 이집트 유물도 전시해 두었다. 유럽 한복판에서 다른 대륙 유물을 보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루브르에 있을 우리나라 문화재를 생각하면 동병상련, 마음이 아프지만.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주제로 한 그림만을 모아놓은 전시 공간에서 농땡이를 치다가 문득 생각나서 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게다가 박물관 카페로 내려오면서 다시 마주친 켄타우로스와 테세우스 조각상을 보니 갑자기 배도 고파지고. 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니 오늘이야말로 빈의 유명한 카페에 들어가서 브라우너와 디저트 하나를 더 맛 볼 생각이었는데, 테세우스에게 얻어맞는 켄타우로스를 보니 문득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나 정말...잔인하다...). 이때부터 그림 관람은 뒷전이 되고 어디서 뭘 먹지 생각했는데, 편하게 맥도날드에 갈까 하다가 왠일인지 햄버거가 싫어져 육성으로 '흥' 소리를 냈다. 나름 생일이고, 빈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얼마가 들더라도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걸 먹자. 난 뭘 먹고 싶지?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슈니첼이 떠올랐다.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질 않아... 그것도 J씨와 가려던 슈니첼비르트의 슈니첼 맛이 궁금해져서, 이후로 그림은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가 49번 트램을 탔다.


처음 찾아갔을 때의 기억을 되짚어 갔다. 가게 안은 이미 만석.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 봐도 자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혼자 와서 조금 창피한데ㅠㅠ 되돌아 나오다가 입구 쪽 넓은 식탁이 빈 걸 보고 0.5초 고민하고는 냉큼 앉아 독차지했다. 마지막 슈니첼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할슈타트에서도 고집 부린 걸 보면 나도 은근 집요한 구석이 있다 허허.




"주문 받아주세요"라고 눈짓해서 받은 메뉴에는 영어로도 친절하게 메뉴 설명이 되어 있었다. 조금 훑어보다가 Pariser Schnitzel을 시켰다. 난 이제 Paris에 가니까... (?)


뒤로는 시끄럽게 수다를 떠는 빈 할배 할매들을 두고 나 혼자 씩씩하게 슈니첼을 썰었다. 음, 맛있어. 조금 기름지긴 하지만 짜지도 않고 고기도 부드럽다. 맥주도 한 모금씩 마셔가면서, 그 둔탁한 독일어로 무어라고 즐겁게 수다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웃음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내 나름의 사치스러운 정찬을 즐기려니 기분이 무지하게 좋았다.


가만 보면 빈과 슈니첼은 닮은 면이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고, 너무 단조로운 모양새에, 상큼한 맛은 없지만, 점점 빠져드는 뭔가가 있는 게 닮았다. 슈니첼의 서민적 풍모는 빈이라는 도시 자체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들지만, 그 무뚝뚝하고 도도한 도시에는 "난 그냥 고기 한 덩이인데, 그래도 나한테 반할걸?"이라고 (나한테만) 말하는 듯한 이 음식이 잘 어울렸다.


슈니첼이 나한테 말을 거는 망상에 빠져 있는데(ㅋㅋㅋ) 웨이트리스가 내 자리가 넓으니 합석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식사도 다 마쳐가는 참이니 그러라고 했더니 아시아 남자 둘을 데려왔다. 눈이 마주쳐 잠깐 대화를 나눠보니 빈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이제 귀국하는 한국인 남학생들이었다. 좀더 빈에 있고 싶다고 말하는 내 말에 "저희도 좀더 있고 싶어요. 빈, 정말 좋죠"라고 맞장구 쳐 주었다.



독일어로 공항은 '플루크하픈'이라고 한다.

독일어를 몰라도 비행기 기호만 알아보면 되지만.


일주일 가까이 머물며 그 사이에 흠뻑 정든 움밧에서 짐을 찾아 나왔다. 공항 버스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S반을 타기로 하기로 했는데, 미테 역에서 표를 사고* 어느 플랫폼에서 어느 기차를 타면 될 지 감을 잡느라 조금 허둥댔다. 이때가 빈에 있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급해져서 패닉에 빠진 때였는데, 다행히 저렇게 친절한 전광판을 발견하고ㅠㅠ 눈치껏, 공항 가는 S반을 제대로 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한 빈.



* 빈 슈베하트 공항과 빈 미테 역을 오가는 S반은 편도 4.2유로이다. 비엔나 교통권을 갖고 있으면 2.1유로짜리 티켓만 추가로 구입해서 탈 수 있다.

빈 미테 역 내에 있는 OBB 사무실에서 직원에게 "S반을 타고 공항에 가려는데요, 저 아직 쓸 수 있는 비엔나 교통권 (난 왜 일주일권을 샀을까ㅋㅋㅋ)있어요"라고 말했더니 찰떡 같이 알아듣고 추가 티켓을 끊어주었다. 사용 기한이 지난 비엔나 교통권도 쓸 수 있는지는 의문.



빈 슈베하트 공항은 깔끔하지만 정말 조그맣다.

조금 과장해서, 강남 지하고속버스 터미널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빈에 올 때와는 달리 파리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티켓팅 카운터 직원이 약간 퉁명스러워서 조금 빈정 상했지만, 별 탈 없이 그리고 생각보다 무척 빨리 빈을 떠나게 되어서 감상에 젖을 틈도 없었다. 아, 파리 시내로 들어오기까지도 조금 사연이 있지. 드골 터미널 3의 그 으슥함과 에어 프랑스 리무진의 몽파르나스행 삽질이란ㅠㅠ 그래도 어쨌든,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드골에 내려서, 내 서바이벌 불어의 덕을 톡톡히 봐 가면서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빈에 가기 전 누웠던 그 침대 바로 아래에서 빈과 이날 하루의 일을 떠올렸다. 나의 가장 특별한 날을 가장 가고 싶었던 도시에서, 뭐가 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냈다니.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기대하긴 했어도 이 정도로 빠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지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던 도도한 도시를, 언젠가 꼭 한 번 더 찾아가고 싶다. 그리고 저절로 힐링되는 청명한 할슈타트도.


오스트리아는 사랑입니다 :)



내가 돌아왔다,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