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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4 mon voyage en Europe

#Rev6 나만의 겨울왕국, 할슈타트_Day 5


같은 방을 쓰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또 다른 사람들이 체크인했다.
​스페인어인지 이태리어인지 아무튼 로망스어 계열 말을 쓰는 여자 둘이 들어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J씨가 나가고 체크인한 이 여자 둘은 늦은 저녁에 손빨래를 하느라 한참동안 화장실을 못 쓰게 하지를 않나, 자기들끼리 큰소리로 떠들지를 않나. 얘네보다 나중에 들어온 멕시코 애들은 조용하니 괜찮았는데.
평온했던 나슈마르크트의 밤이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다. 쪽수에서 밀리니 말도 못하고, 찌그러져 있어야지 뭐. 흑. 시끄러운 건 아주 진절머리가 나.

그러니 그 다음날 호스텔을 떠날 때 내가 얼마나 홀가분했겠냐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마치고, 빈 서역으로 향했다.

잠시 빈을 떠나 할슈타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는 일정이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움밧의 조식을 먹었다. 더럽게 맛 없었다.


다소 부족한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서역으로 향했다. 전날 중앙 묘지에 가느라고 한 번 들러봤더니 지하철 갈아타는 것도 아주 척척이다. 출근하는 빈 사람들에 뒤섞여서 캐리어도 번쩍번쩍 들고 계단을 통통통 내려가는데 뭔가 아주 뿌듯했어.


네 밤을 보낸 빈과는 잠시 이별이다. 처음 오스트리아에 가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빈은 당연히 가는 곳이었지만, 일주일 가량을 한 곳에서만 머물기에는 조금 지루할 것 같아 고민하다가 외박(?)할 곳으로 고른 게 할슈타트였다. 이미 그 아름다움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한 번도 가 봤'고, 인터넷에서는 봄여름의 할슈타트를 찬양하지만 그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힌 겨울 할슈타트가 궁금해 가 보기로 한 것이다.


빈에서 할슈타트까지는 기차로 4시간이 걸린다. 오스트리아 철도청(OBB)에서 미리 표를 예매했고, E-ticket을 챙기면 기차표는 따로 프린트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난 기차표가 너무 갖고 싶어서 프린트했어. 서역 사무실에서 1유로를 주고 굳이.*



* 예매표를 현장에서 발권하더라도 발권 번호 정도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함.




할슈타트에는 마트가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미리 들었다. 마침 관광 비성수기에 접어든 할슈타트라고 하니 걱정이 되어 서역 안에 있는 마트에서 물과 바나나를 샀다. 할슈타트 비상 식량으로 샀는데 배고파서 바나나 하나 까서 먹었어. 아 부실한 움밧 조식이여.




기차는 직행도 있고, 환승편도 있다. 내가 탈 기차는 10시 56분에 서역을 출발하는 IC548편.

한국에서는 기차 탈 일이 없어서(그나마 중앙선?) 기차 타러 가는 길이 엄청 떨렸다.




기차에 올라타니 차장 아저씨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자리마다 Ihre Reisebegleiter(Time Travel Information)을 하나씩 놓아주고 있었다. 환승을 해야 하니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아저씨를 불러 세워 저 이 기차 타는 거 맞아요라고 물어보았다.

내가 탄 기차는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 나는 중간에 아트낭푸하임이라는 곳에서 내려서 R3418편으로 갈아타야 한다. 서역 OBB 직원도, 차장 아저씨도 여기서 꼭! 갈아타라고 신신당부했다. 심지어 차장 아저씨는 저 타임 테이블까지 직접 펴서 보여줬다.


상냥해...(하트) 


오스트리아 여행을 하며 의외였던 것은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것이다. 런던 여행을 했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대치가 낮아서 그랬나. 길을 물어보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하고 영어도 잘 통해서 편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진짜 불친절하긴 해.



추울발.


서역을 떠날 때만 해도 내가 앉은 좌석 칸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일기도 쓰고, 안에 콘센트도 있어서 아이폰이랑 노트북도 충전하고, 혼자 또 바나나 까 먹고 띵가띵가 하고 있었는데. 린츠쯤 지나니 아가씨 하나, 아줌마 하나, 아저씨 하나 이렇게 탔다. 골고루도 탔네.




차창 밖 풍경을 보니 점점 시골로 들어가고 있는 건 알겠는데, 아트낭푸하임까지는 역사나 플랫폼이 꽤 현대적이고 깔끔하다. 대신 사람이 없어서 쫄았어. 내 기차가 대체 뭘까, 언제 들어올까,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를 보니 전광판이 있어서 금방 내 기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완전 편해.



이제 도시 풍경은 사라졌다.


아트낭푸하임에서 갈아타니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시골 풍경이었다. 기차 트랙도 점점 굽이치고, 린츠까지만 해도 영어도 곧잘 들렸는데 할슈타트 가는 길에 우르르 올라탄 사람들은 죄다 독일말만 썼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귀 기울여 듣고 있는데 점점 긴장된다. 이제 여기서는 길도 못 물어보겠네. 중간중간 기차가 역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역 이름을 꼼꼼히 눈여겨 보았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




풍경은 점점 호수를 끼고




높아지는 산에는 그림처럼 눈이 덮이고 구름이 걸리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풍경. 하악.




간이역 같은 시골 역들을 쫘르르 지났는데도 또 한참을 달려서야 할슈타트 역에 도착했다. 실로 시골이어라. 여긴 뭐 플랫폼도 없어, 그냥 내리면 된다. 캐리어를 들고 끙차 하고 내리는데 한국인 남자 둘이 보였다. 손에 팜플렛만 들고 있는 걸 보니 당일치기인가 봄.


나의 여행 생존 전략: 어딜 가든지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을 찾아둬라.




인터넷에 숱하게 올라와 있는 할슈타트 간이역 사진.

꽤 멋있게 보이길래 나도 하나 찍어서 사진 한 장 더 보탠다. 


 


플랫폼 아닌 플랫폼에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하나 있는 길 따라 쭉 내려와요, 할슈타트 가고 싶으면.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할슈타트에 내려서 이제 어디로 가야 했는데, 그 남자들 아니었으면 따라갈 사람도 못 찾고 또 한참 시간 버렸을 지도. 하, 내가 이래요. 길을 겁나 못 찾는데 여행은 또 혼자 다니는 맛이 들려서ㅠㅠ


호수 마을 할슈타트에 가려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버스(차)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기차를 타면 나처럼 할슈타트 역에 내리게 되는데, 이때는 호수를 건너야 하므로 저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영락없이 거칠고 후줄근한 시골 아저씨 같은 선장님 둘이 운전하는 페리를 탈 수 있다.


단 둘 밖에 없으니 선장 선원 할 것 없이 선장이라고 하겠다. 말로라도 출세하면 좋지 뭐.


이 선장님들은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아주 간단한 영어-one, two...-정도만 구사한다. 표를 사고 팔려고 어쩔 수 없이 영어 하시는 느낌인데 영어 못한다고 까는 게 아니라 뭔가 정겨웠다. 전 왕복 표 끊으려고요, 라는 의사 표시를 하려고 손짓 발짓을 했는데 선장 아저씨가 조용히 배 안 벽에 코팅되어 붙어있는 가격표를 가리켰다. 아하하. 페리 표는 왕복 4.8유로, 편도 2.4유로였다.


이 페리에서 조금 당황스러웠던 건 이게 한 번 써 먹었던 표인지 아닌지를, 표 위 끝을 살짝 찢어 표시한다는 것이다. 그걸 보고 왕복 표 중 하나 남은 표는 안 찢어지게끔 조신하게 여행 다이어리 사이에 끼웠다. 이거 찢어버리면 ㅈ...아니, 2.4유로 또 쓰는 거여.



* 많이들 이용하는 버스 노선은 잘츠부르크나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타는 버스 길이다. 보통 잘츠부르크-할슈타트 구간은 바트이슐이라는 곳을 거쳐야 한다고. 버스도 직행은 없나 보다. 




할슈타트에서 묵을 숙소를 향해. 옛날에는 소금 광산, 지금은 관광업으로 먹고 사는 할슈타트에는 주민들이 경영하는 펜션이 많다. 하지만 여름 성수기에는 그 많은 비앤비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서 4개월 전에 문의하면 유명한 호텔이나 비앤비는 이미 예약 full. 예전에도 할슈타트에 오려고 시모니(사진 속 빨간 건물) 포함해서 거짓말이 아니라 대여섯 곳에 이메일을 보냈는데 전부 다 거절 당했다ㅠ


겨울에는 방이 많았다. 서너 곳 정도에만 이메일을 보냈는데 여기도 방이 있고 저기도 방이 있다고 해서 이번에는 내가 갑질 좀 했다 하하. 땅콩 집어던진 건 아니고요... 그냥 내 마음대로 방을 골라봤어요.


할슈타트에서 방을 골라 가는 호사를 누리다니ㅠㅠ 그럼에도 하룻밤 방 값 치고는 비싸서, 어디로 가야 하지 하다가 페리 선착장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조용한 숙소, 그루너 앙거를 예약해 두었다. 싱글룸 가격으로 트윈룸 쓰기.


선착장에서 조금 걸어야 한다고 해서 뭐 얼마나 걷겠냐 했는데 진짜 저 멀리 깊숙이 떨어져 있어서ㅋㅋㅋㅠ 10여분은 족히 걸었다. 눈에 젖을까 캐리어를 조심스레 끄느라고 도착하고 보니 히트텍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땀 뻘뻘 흘린 나를 보고 그루너 앙거 아저씨가 "우리 집이 좀 멀지?"라며 웃었다. 위치를 커버하는 그루너 앙거의 친절함.


아저씨의 무안함을 덜어주려고 "아니요, 오면서 마을 구경도 하고 좋았어요"라고 대답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천천히 걸어 오면서 호수 풍경도 감상하고, 거리를 따라 늘어선 -비록 문은 닫혀 있었지만- 상점 구경도 하는데,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긴 한데 힘들지가 않아. 시모니나 그루너 바움에서 묵었으면 하지 못했을 산책이었다. 




일단 거추장스러우니까 다운코트는 좀 벗고 가실게요


방은 정갈하니 마음에 들었다. 와이파이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호스트 아저씨가 준 할슈타트 지도를 보고 대강 감을 익혔다.



마을 중심을 향해 온 길 천천히 되짚어 가기.


비성수기라고 해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정말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호수 쪽으로 가면 단체 관광을 온 사람들이 많았고, 글쎄, 그 외에 마을 사람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오후 4시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도 가게도 문을 죄다 닫았고, 그 유명한 소금 광산도 내가 간 날은 문을 닫아두었다. 나중에 그루너 앙거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관광 수요가 없는 시즌에는 할슈타트 사람들도 다른 곳으로 휴가를 간다고 한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관광지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로 관광을 가죠? 그것도 이렇게 예쁜 곳에 살면서, 눈이 높아져서 휴가를 잘 보내려나 몰라.



오리 꽥꽥!


호수가에 다가가니 단체 관광을 온 대만 사람들이 오리 구경을 하고 있었다 댁들도할거없군요. 그루너 앙거 호스트 말고는 사람 구경을 못한 나는 우쭈쭈 하며 오리를 부르다가 그들의 사진사 노릇을 해 주었다. 근데 내가 대만 사람처럼 생겼나? 대뜸 중국어로 말 걸고 난리야. 머리 검은 아시안이면 다 중국어를 할 거라는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라는 속마음을 숨기고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일가족이 함께 여행 온 모양인데 흥을 깨뜨릴 수는 없지. 무릎까지 굽혀가면서 열정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그들이 찍은 단 한 장의 내 사진은 왜...왜 이 모양이에요.




캬.




원래 나는 걸음이 빠르다. 대한민국 평균 여자 키임에도 발도 빠르고 보폭도 넓어서 동생이 "내 걸음에 맞춰서 걸을 수 있는 여자는 누나 밖에 없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의식을 하지 않으면 내쳐 달리듯이 걷는 나도 이곳에서는 정말 느릿느릿 걸었다.

온 마을이 적막했다. 정말 죄다 휴가라도 가 버렸나. 돌아다니는 내내 안에 불이 켜진 집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그러다 보니 할 일이 많지 않아 그저 천천히 걸으면서 풍경을 음미하고 고요함을 귀에 담는 수 밖에. 




평소 같았으면 백퍼센트 울었을 것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데도 외지에 혼자 뚝 떨어져 있을라 치면 단 1초도 가족 생각, 친구 생각을 하지 않는 적이 없다. 처음 배낭 여행을 할 때는 그 외로움을 못 견뎌서 사나흘 정도는 매일 울면서 돌아다닌 것 같다.


할슈타트에서는 왜 안 울었나 모르겠네. 다만 두 시간 남짓 걸으며 본 이곳이 정말 아름다워서 조금도 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던 덕도 있는 듯 하다. 봄여름에 오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기간에 할슈타트를 찾는 사람이 많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사진을 통해 본 싱그러운 할슈타트가 예뻐서 반하긴 했다. 하지만 내가 본 할슈타트가 더 아름다워. 거대한 호수를 품고 구름이 걸린 산, 그리고 그 자락에 얹히듯이 오밀조밀 자리잡은 마을을 보니 저절로 평화로워졌다. 3년 전 아비뇽에 갔을 때의 그 차분한 기쁨이 다시 떠올랐다.


그 고요함의 호사를 톡톡히 누렸다. 사람이 많았으면 가 보지 않았을(못했을) 골목도 구석구석 들어가 보고, 이런 상점을 발견해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소금 광산으로 유명한 곳답게 작은 기념품 상점에도 온통 소금 뿐이었다. 하나 살까 하다가, 냅다 포장 뜯고 먹기에는 소금 결정이 너무 예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과대 포장된 듯도 하여ㅋㅋㅋ 스마트 컨슈머인 나는 하나 집었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나중에 엄마한테 잘했다고 칭찬 받았다. 헤헷.




마을 반대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안개가 보슬비가 되어 내려서 우산을 꺼내야 했다. 파리 심플리 마켓 덕분에 비 안 맞고 다녔다.




페이스북에 할슈타트 사진을 올렸더니 사촌동생이 "겨울왕국 같네"라고 말했다. 그게 뭐야라고 했지만-여행 중이라 '겨울왕국'이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걸 몰랐다- 뭔지는 몰라도 정말 딱 그 말이 어울렸다. 여기야말로 겨울왕국이지, 조용하고, 모든 것이 죽은 겨울인데도 온기가 흘러 봄을 예감하게 하고. '겨울왕국'은 엘사의 얼음 왕국에 가깝지 않나...




여기가 그 유명한 5성급 헤리티지 호텔이라면서요?!

딱 봐도 넘쳐 흐르는 부내.




한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해가 져 있었다. 다섯시 정도 밖에 안 됐는데, 다 좋은데 아무래도 겨울 유럽의 트랩에 걸려서 할슈타트 구경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 동네는 가로등도 없어 너무 무서워ㅠㅠ 이날은 그냥 마을 반대쪽까지만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트도 문을 닫고 관광 안내소도 문을 닫아서 마땅한 레스토랑 추천도 못 받고, 이래저래 저녁 식사를 어디서 해결해야 하나 난감해 하다가 그루너 앙거가 저녁이면 마을 레스토랑 노릇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걸 떠올렸다. 오늘은 이만 하고 들어가지 하면서 걷다가, 그루너 바움 호텔 레스토랑을 살짝 들여다 보았는데 음식도 맛있어 보이고 호수 경관을 보며 식사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빨려들어가듯이 들어갔다ㅋㅋㅋ


혼자임에도 용기를 내서 들어갔는데, 아쉽게도 단체 예약이 잡혀 있어 식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분위기도 좋고 그 사이에 음식 맛도 좋다는 평도 읽어서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가게 밖에서 서성이다가 "으아아아! 지금 아니면 안 돼!"무슨 상관 하면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예약하고 다시 오겠다,라고 조금 끈질기게 말했더니 리더처럼 보이는 웨이터가 망설이다가 몇 분이면 식사를 다 할 수 있냔다. 25분이라고 했다가 살짝 쫄려서 "20분"이라고 하니 그럼 들어와서 지금 식사하라고 들여 보내 주었다. 행운 같기도 하고 굴욕 같기도 하고ㅋㅋㅋ


조금은 찜찜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무난하게 슈니첼을 주문.




센티미터에서처럼 감자 튀김은 나오지 않았지만, 버터를 구운 감자와 샐러드가 일품이었다-슈니첼은 감자랑 먹는 건가 봐요? (해맑). 슈니첼은 짜지도 않은 것이 부드럽게 씹히고. '올' 감탄하면서도 정해진 시간이 있어서 식사를 허겁지겁 마쳐야 했다 (굴욕임에 틀림없다 이 식사는. 고기를 여유롭게 음미하지 못하다니). 그루너 앙거의 요리 솜씨는 어떤지 이젠 알 길이 없어졌고 예산도 한참 초과했지만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어 좋았다.


다만 샐러드를 먹다가 테이블보에 조금 흘렸다. 날 들여보내준 웨이터에게 밥 먹다 흘렸어 완전 쏴리라고 말했더니 웨이터가 웃으면서 "오 노~마드모아젤~"이라며 놀렸다. C교수 생각나네. 아무래도 유럽 사람들은 나를 중딩 정도로 생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꼬마 정도로 보고 맨날 놀려ㅠ




혼자 길가에 앉아있는 눈사람. 괜히 정겹네.




계산을 마치고-예산은 넘겼지만 날 서빙해 준 웨이터에게는 팁을 두둑히 줬다. 나 착함- 조용히 다시 숙소 쪽으로 걸었다. 아무래도 조금 아쉽다 하던 차에, 숙소 맞은편에 있는 호프집을 발견했다. 음... 한 잔 하고 싶긴 한데, 혼자 술집에 들어가기가 조금 민망해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번 여행에서는 처음으로 혼자 해 보는 게 참 많아.


가게 안을 슥 둘러보니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 몇 명이 모여 식사에 맥주를 곁들여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외국인인 나를 보고 바에 있던 아저씨가 메뉴를 가져다 주었는데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라. 독일어를 못하는데 무슨 소용?ㅠㅠ 그래도 lemon이라고 쓰인 걸 보고 제발 제대로 시킨 것이어라 빌면서 기다렸는데, 다행히 정말로 레모네이드 맥주가 나왔다. 구석에 조용히 앉아서 이해도 못할 독일어 수다도 들어보고, 옆 테이블 꼬마가 장난 치는 것도 꽤 인내심 있게 받아줬다.


 


가로등이 없으면 정말 칠흑 같을 어둠이었다. 해가 있을 때 보았던 호수도 이제는 어디가 땅이고 호수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졌고. 밤이 되니 돌아오는 길도 훨씬 조용했다.


그래도 무섭다기보다는, 끝까지 평온했다. 움밧 룸메이트들이 준 소음의 시련에서 벗어나서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난 운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