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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4 mon voyage en Europe

#Rev3 먹고 보고 사랑하라 빈!_Day 2

 

이날 여행을 이야기하기 전에 전날 호스텔에서 만난 이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전날 신나게 나홀로 비엔나 워킹 투어를 마치고 호스텔로 돌아간 나는, 내 방에서 한 여자 분이 짐을 푸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가 캐리어 두고 갈 때만 해도 텅 빈 방이었는데...?

서로 멈칫멈칫하면서 눈치를 보다가 그분 하시는 말씀, "한국 분이세요?"ㅋㅋㅋㅋㅋ 그렇게 룸메이트이자 동행이 된 J씨를 만나게 되었다.

 

J씨와 도란도란 여행 이야기를 하는데, 또 문이 열리더니 이번에는 금발의 백인 여자가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Oh~Hi :D" 라고 친근하게 인사하는 그 여자는... 브라질리언 베아트리스였다.

신기하게도 J씨가 들어온 이후로, 베아트리스에 이어 원래 그 방에 묵고 있던 Y씨도 만났고, 이제 잠자리에 들려던 때에는 이름 모를 이스라엘 아주머니도 들어와 순식간에 방이 꽉 찼다. J씨... 피리 부는 아가씨였던 건가.

 

아무튼 그렇게, 빈에서 뭘 할지 계획이 없다는 건 나랑 똑같은 J씨에게 "시장 구경하지 않을래요?"라고 제안해서, 아침부터 호스텔 근처의 나슈마르크트 시장을 둘러봤다.




대충 씻고 나온 터라 시장에서 파는 온갖 케밥과 빵 냄새에 넘어가기 직전이었다ㄷㄷ

우리 호스텔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저렴한 레스토랑과 식료품점이 즐비했고, 왼쪽으로는 벼룩시장이 열려있었는데, 하필이면 오른쪽으로 먼저 가는 바람에ㅋㅋㅋ

꼬치와 절임을 보면서 두 손 싹싹 비비고 있는 내 사진도 있는데 내가 생각해도 너무 없어보인다.



시장은 역시 새벽 시장이쥬


그나저나 이 날씨에(영하 7도 정도 됐던 것 같다. 찬바람도 쌩쌩), 이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이 고물들을 구경하고 흥정하는 데 여념이 없다. 식료품 거리는 이미 오래 전에 한바탕 휩쓸었는지 웬만한 음식점들은 벌써 물건이 없었다. 부지런도 하셔...

 

부지런한 빈 사람들과는 달리, 이 두 명의 여행자는 세월아 네월아... 느릿느릿 장을 봐서 겨우 아침식사까지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가보려고 방으로 올라왔는데 일찌감치 나간 줄 알았던 Y씨가 있었다.


그렇게, 셋이서 레오폴트 무제움에 가 보기로 한 게 정오였다. 이제야 관광 시작이라니ㅋㅋ



 

전날, 로맨틱한 기분에 흠뻑 취한 내 눈에 보인 레오폴트 무제움

 

 

 

그리고 이날 아침 이곳에서 내 마음 속 음란 마귀가 부활했다.jpg


전날 이미 눈도장을 찍어둔 레오폴트 무제움이 눈에 보이는 순간, 솔직히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외벽에 턱 하니 걸려있는 쉴레의 그림 때문에ㅋㅋㅋ딱 봐도 어마 낯 뜨거라 할 그림이었다ㅋㅋ

다녀와서 이 얘기를 하니 학부 시절 은사님이 "에구 또 순진해 가지고 그런 거에 놀랐어?ㅋㅋㅋㅋㅋ"며 놀리셨다. 예술이니 좀 의연하게 받아들이라고 하셨지만, 꽤나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그런 그림을 외벽에 떡~걸어놓은 것 때문에 순진한 이 처자는 엄청 놀랐다고요!

 

거기서 알아야 했다. 쉴레 그림의 대부분은 다 그렇게 과감했다는 것을...

 

 

내가 보고 있던 것.jpg

 

이 단순한 회색 육면체 건물은, 사실 눈에 띄는 디자인이 아닌데도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무 치장도 하지 않아서 더 세련된 3,40대 신사 같다고 할까.

이 매력적인 미술관에서는 그 유명한 구스타브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에곤 쉴레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빈을 돌아다니며, 클림트가 빈의 가우디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백년여 전에 죽은 가우디가 지금의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고 있듯이, 빈도 이미 한 세기 전 사람인 클림트가 남긴 유산에 관광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다. 좀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면 오스트리아 전체가 모차르트 덕에 먹고 사는 것 같고.


아무래도 이미 생전에 명성을 얻은 중부 유럽 미술의 대가이고, '키스'의 화가이니 당연하겠지만, 오히려 이 미술관에서 보아야 할 것은 쉴레가 아닐까 싶다. 상대적으로 클림트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내 생각에는 쉴레야말로 이 미술관의 주인공이었다.

 

 


에곤 쉴레의 자화상. 사진 보니 잘생겼음ㅋㅋ




레오폴트 무제움은 플래시만 터뜨리지 않으면 실내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고 온화한 분위기의 클림트의 작품에 비하면 쉴레의 것은 어둡다고 할까.

보다 노골적이고 과감하고, 클림트에 비해 '날것'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저 '추기경과 수녀'만 해도, '저거...그릴 때 아무 일 없었나?' 생각했을 만큼, 천주교 신자도 아닌 내가 살짝 불편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다소 에로틱하다면 그렇고, 배배 꼬인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쉴레의 그림이, 나는 왠지 모르게 좋았다.

어쩌면 며칠 후 '베토벤 프리즈'에서 3장이나 4장이 아닌 2장에 더 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 것과 같은 맥락일 수도 있겠다.

생전에 명성을 얻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심지어 오래 살기까지 한 클림트와는 달리, 쉴레는 자신만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명성을 일구고 펄펄 날아다니다가 스물여덟에 요절한 사람이다. 두 화가의 생애의 차이가, 그림에서도 (내 눈에는) 극명히 다른 차이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추측하고 있다.

그러니, 클림트를 비하하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런 패기 넘치는 젊은 천재의 그림이 이제 겨우 생전의 그와 비슷한 나이대가 된 내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긴 건 아닐까.

 

결혼 후 그가 그린 그림에서 사뭇 따뜻함과 안정감이 느껴진 것을 보면서, 이런 내 추측은 거의 확신이 되었고, 남들이 다 좋아하는 클림트의 '키스' 앞에서도 별 감흥이 없었던 걸 보면 난 아마 중년이 되어서야 클림트의 그림에 빠지려나 보다.

 

쉴레의 그림에 푹 빠지고, 오토 바그너의 설계도에 둘러싸여 소파에 앉아 빈 시내를 한참 감상했다.



창틀 안에서 한 폭의 그림이 된 빈 시내


그러다 보니 코코슈카는 보는 둥 마는 둥...

 

잔뜩 들떠서 "빈 좋아! 쉴레 좋아!"를 외치며 무제움을 나왔다. 내 손에는 이미 쉴레 엽서가 한 세트였다ㅋㅋ

 

무제움을 나오니 서너시 쯤 되었을까. Y씨의 제안으로 카페 자허에서 자허 토르테를 먹기로 했다.

케른트너 거리 끝자락에 있는 카페 자허는 엄청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간 카페 자허는 정말 "빨리 먹고 가세요" 용으로 연 곳이고, '원조' 카페 자허는 골목을 돌아 같은 건물 한적한 자리에 있었다. 그 앞을 지나면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자니 이날 그 복작대는 카페 자허에서 서두르듯이 커피와 토르테를 흡입했던 게 못내 아쉽고 섭섭했다.




전날 밤에 호스텔에서 보고 나온 세계테마기행-빈 편에서, 토르테는 멜랑주와 먹는 거라고 하길래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멜랑주를 주문했다. 내 멜랑주 옆에 보이는 게 Y씨가 주문한 아인슈패너.

 

자허 토르테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냥 엄청 단 초콜릿 케익이다. 불쾌할 정도로 달진 않지만 '이게 왜 유명하지?'라고 의심하게 되긴 하더라ㅋㅋ

 

"우리 이제 뭐 해?..."

 

셋 다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다닌 하루였다. 뭔가 더 있을텐데, 갈 만한 곳이 있을텐데.

 

"우리 립 먹으러 갈래요?"

 

Y씨가 여행 중에 우연히 알게 된 남자 분이 짧은 부다페스트 여행을 마치고 빈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이 친구가 유명한 립 식당을 안다기에, J씨랑 나는 거기 묻혀서 립을 먹기로 결정하고, 해가 진 저녁이 되어서 호스텔에서 Y씨 친구를 만나 식당으로 향했다.




자허 앞, 슈타츠오퍼 옆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팜플렛을 돌리던 시위자는 이집트 독재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라고 소개했다.

관심이 가서 팜플렛을 들여다 보려고 했는데 나보다 먼저 팜플렛을 보던 Y씨가 미을 찡그렸다.

팜플렛에 독재를 반대하다 고문으로 죽은 사람들의 사진이 생생히 실려 있었다고.

그 말에 볼 엄두가 나지 않아 팜플렛은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다.

우리도 한때 독재의 역사를 경험했으니 이 사람들의 바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역 안으로 들어와도 겁나 추웠다.




언제나 나의 로망이었던, '여행지의 낯선 사람들과 맥주 한 잔 하기'


비쌀까 걱정도 되고, 사실 맛집이 어딘지도 몰라서 립을 먹으러 가는 건 내 계획에는 없던 일이지만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우연을 따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케른트너 뒷골목으로 요리조리 들어가 식당 한 켠에 자리잡고 앉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립스 오브 비엔나'라는, 꽤 유명한-유명하다 못해 거의 관광지처럼 된- 식당이더라.




사진 보니 다시 군침 돈다ㅠㅠ 역시 고기가 최고야!!!!!




좋은 건 확대해서 봐야.

 

근데 내가 이런 걸 먹을 때 누가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 유형이라는 걸 얘기했던가?

고등학생 때도 급식에 생선이 나오면 친구가 가시를 발라줘야 겨우 먹는 손 많이 가는 나... 소근육이 덜 발달해서 세심한 수작업은 전혀 못 하는 나...

립을 먹는데도 뼈를 깔끔하게 발라내지 못해서 한참 쩔쩔맸다. 맛있는 걸 앞에 두고 왜 먹질 못하니!!ㅠㅅㅠ


아, 그런데 좀 궁상 떨자면, 이렇게 맛있는 걸 먹으면 꼭 가족 생각이 난다. 엄마도 이거 드셔봤으면 좋을걸... 고기로 느끼는 포만감과 어쩐지 사치하는 기분이 집의 안락함을 떠올리게 하고 부모님의 일상이 안타까워진다.

 

배불리 먹고 나오니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이미 몸은 천근만근인데, 일행이 도나우 타워로 간단다. 어딘지도 모르지만, 에이 몰라! 오늘은 얘네 다니는 대로 다녀볼래.

 

도나우 타워가 있는 Alte Donau 역은 우리로 치면 중랑역 같은 느낌이었다. 한적한 듯 한적하지 않은 한적한................ 사람도 없고 깜깜하고 아주 무서워.


찻길을 따라 걷다가 더 빠를 것 같다는 이유로 공원으로 들어갔는데 왠걸.


넷이어도 엄청 무섭다ㅠ가로등도 별로 없고...깜깜한 길가에서 누가 툭 튀어나와 덮칠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상상에 어질어질했다. 겁은 또 더럽게 많아서. Y씨 팔을 매달리듯이 붙잡고 엄마.....ㅠㅠ를 찾으면서 한참을 걸어 겨우 도나우 타워에 도착했다.




너무 생뚱맞게 갑자기 솟아나온 듯한.


늦은 밤까지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영어 잘하시는 파파 할머니에게서 표를 사서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야경을 감상한다.

근데 문제는,

 

추워!!! 더럽게 추워!!!!!!!ㅠㅠ

 

안 그래도 추운 1월의 빈인데 지상 165m의 빈은 진짜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극한 오브 극한의 추위였다. 사진을 찍으러 밖에 나가면 미친 것 같은 찬 바람이 정말 송곳처럼 뺨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직 고등학생인 것처럼, 우리끼리 꺄하하핳 추웤ㅋㅋㅋ를 연발하며 들락날락 하기를 몇 번 하다가 겨우 전망대 한 켠 의자에 앉았다.




난 정말 이 도시에 홀린 것 같다. 그다지 뛰어날 것 없는 야경인데도, 나한테는 볼수록 다른 그 어떤 도시에 견주어도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세상 최고의 풍경이다.

 

어제 오늘, "추워 추워"를 입에 달고 다녔으면서도, 빈의 이 추위마저 견딜 수 없이 좋다. 이 도시는 오만할 정도로 시크하고 쿨하지만,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는 풍부한 감성을 지닌 신사 또는 귀부인을 연상하게 한다. 겁나 츤데레 같은 매력이야ㅠㅠ

 

그 자리에서 "빈이 좋아...너무 좋아"를 수십번은 되뇌인 것 같다. 옆에 앉아있던 Y씨가 "언니는 또 빈에 오겠네요?"라며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게,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어.

 

좋은 사람들과 함께 다녀 더 즐거운 하루를 이렇게 멋진 야경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니,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게 인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