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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 Voyage/'14 mon voyage en Europe

#Rev2 빈에 익숙해지기_Day 1

 

나는 비행기를 좋아한다.

뜬금없지만, 첫 여행의 동기도 단순히 비행기를 타고 싶어서였기 때문에, 인턴 시절 오스트리아나 스위스로 출장 가는 회사 분들이 비행기라면 치를 떠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요컨대, 내가 생각하는 비행기라는 것은, 자유와 이국으로 가는 티켓 그 자체이기 때문에, 비행기를 탄다는 행위는 나에게 있어 큰 기쁨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틀 만에 사라졌습니다.

 


에티하드 비행기를 타고 그 안에서만 17시간을 보내고 나니 살짝 미칠 지경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 무릎 아파, 발바닥 시려... 집에는 이걸 어떻게 또 타고 가지?!

그런데 그 고생을 감수하고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 다음날 또 비행기를 타고 빈에 가야 한다!

내가 짠 일정이지만 참ㅋㅋㅋㅋㅋ

 

비행기를 타는 데 따르는 또다른 귀찮음은, 공항까지 가야 한다는 데 있다.

더군다나 돈 없는 배낭여행자가 저가항공을 저렴하게 타려면 새벽이나 한밤중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그때 공항까지 찾아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도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다.

파리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나는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샤를 드 골 공항으로 가서 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아침 9시경 비행기였기 때문에 넉넉하게 6시에는 루아시를 타기로 했다.

 

루아시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을 때 마음에 걸렸던 건 오페라 부근의 집시들이었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왜? 내가 오페라에 있는 아침 6시에는 루아시를 타러 온 사람들 밖에 없으니까!

가게도 문을 연 곳이 없고, 1월 말 파리의 아침은 꽤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집시 애들은 새벽 6시에 나와서 삥을 뜯을 정도로 부지런한 편이 아니다.

걔네도 잠은 잔다.

 

아무튼, 부랴부랴 씻고 짐을 정리해 초조하게 루아시를 탄 게 아침 6시였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만에, 친절한 프랑스인 기사 아저씨는 "Terminal 3!"를 외치며 나를 루아시 3터미널에 내려주었다.

늦었을까 걱정했는데, 체크인 카운터의 흑언니가 "너 안 늦었어~완전 괜찮아!"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니 그 언니와 옆 카운터 언니가 웃는다.


 

이게 유럽 최고, 최대의 공항, 드골 공항입니다 여러분!


약간 고속버스 터미널 같은 느낌의 CDG 제3터미널. 루아시에서 내려서 굴다리를 지나 터벅터벅 걸어야 나온다.

면세점도 없고, 배기지 클레임 벨트도 딱 4,5개 밖에 없다.



파리 그림 그린 비행기라고 사이즈도 파리만 할 줄이야.


시간이 되어 게이트가 열렸는데, 바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이트 밖에 대기하던 버스에 옹기종기 타서, 1분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요 쪼깐한 비행기에 이렇게 알아서 타야 한다ㅋㅋㅋㅋㅋㅋ

아시아나랑 에티하드 비행기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이다. 좌석 모니터도 없어서 빈까지 가는 2시간 동안 일기를 쓰고 꾸벅꾸벅 졸았다.

 

사실 이번 여행은 '빈에 오고 싶어서'라는 또다른 동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3년 전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라는 책을 읽었고, 심심할 때마다 그 책을 꺼내 읽으면서 빈을 사랑하는 저자의 절절한 마음을 느껴, 나도 빈에 가면 인생이 아름다워질 것 같은 상상에 세뇌되었다.

 

그런데 그런 낭만적인 감정은 차치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뭐? 난 독일어를 한 마디도 못한다는 것.


심지어 빈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법도 완벽하게 알아오지 못했다. 무슨 표를 사면 된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 표를 못 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시뮬레이션하지 않았던 것. 빠가.



쬐깐한 빈 슈베하트 공항. 작아도 깔끔하고 잘 정돈된 인상이었다.

 

빈 슈베하트 공항에 내려 S반을 타고 가려고 티켓 발권기 앞에 섰는데, 내가 사려는 72시간 교통권을, 글쎄, 이 발권기에서는 팔지 않는 거다ㅠㅠ

(당황스러우면 웃음부터 터뜨리는 습관대로 실실 웃으면서) 쩔쩔매는 나를 보고 한 오스트리아 아주머니가 도와주겠다고 나섰지만,

아예 그 티켓을 안 파는데 그 아주머니가 무슨 수로 나를 도와준담.


둘이서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그때.


"한국 분이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하나님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저에게 천사를 보내주셨군요ㅠㅠㅠㅠㅠㅠㅠ


드골 공항에서부터 보아온 얼굴이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동양인은 전부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거기 나 말고 한국 사람이, 그것도 똑같은 비행기를 타고 빈에 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그분이ㅠㅠ날 구해주려고 함께 파리에서부터 오셨는가봉가. 게다가 독어도 잘해ㅠㅠ

 

빈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그분, E씨(언니인 것 같았지만 나이는 모르므로)의 도움을 받아 같이 S반을 타고 왔다.


E씨는 내 숙소가 있는 곳의 역에서 교통권을 사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쓰라고 조언도 해 주었고, 독어 읽는 법과 독일어 인사도 몇 마디 가르쳐 주었다.


여행 잘하라고 격려도 해 주시고... 이렇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인사를 나누고, 내가 먼저 미테 역에 내렸다. 아, 꽤 큰 역이다.

사람도 많고 건물도 넓다. 그렇지만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다. U4라는 글자가 귀신 같이 눈에 들어와서 누구에게 신세 질 필요도 없이 혼자 착착착 메트로를 타고 숙소까지 갔으니까.


이게 빈에 대한 내 첫인상이라고 할까.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깔끔하고 편리했다.

거의 모든 표지판이 헷갈리지 않고 명확했고, 웬만한 사람들은 영어를 잘해 독어를 잘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러니, 낯선 곳이라고 황황해 할 일이 거의 없는, 정말 살기 편하고 좋은 도시였던 거다.

 

그럼에도 어쩐지 빈이라는 곳이 낯설게 느껴졌던 건, 런던이나 파리, 바르셀로나와는 사뭇 다른 건물도 한 몫 했을테고, 비행기 표만 덜렁 예약한 나의 준비성 제로, 그리고 런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흐린 겨울 빈의 날씨 때문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빈과는 거리가 있는 풍경에 약간 실망하기도 했고, 준비를 하지 않은만큼 이제 뭘 하지 하는 막막함에 숙소에 짐을 맡기고 나와서도 넋을 탁 놓고 말았다.

 

그렇게 흔들흔들 케른트너 거리를 걷다가, 눈에 띄는 스타벅스로 아무 생각없이 들어갔다.




친절하게 주문을 받아준 스벅 파트너 덕분에 긴장했던 마음이 살짝 풀렸다. 이 따뜻한 모카 라떼를 쥐고 스벅 한 켠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문득, 이건 내가 원하던 여행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터덜터덜 걷기만 했던 네르하에서의 무력감이 떠올라 진저리를 쳤다.

오고 싶던 곳에 왔는데 전혀 즐기지 못하는 꼴이라니...즐겨야 해!라는 약간의 강박이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것 같았다. 빈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윗소로우의 '괜찮아 떠나'를 들으며 느낀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의욕이 없었지만, 이게 내가 원하던 빈은 아닐 거라고, 날씨와는 상관없이 그건 지금 내가 보는 빈과 다를 거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호스텔에서 준 지도와 스벅 와이파이로 대충 내가 가고픈 곳을 정하고, 기세좋게 일어났다.

그리고 일단 거리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호프부르크 왕궁은 한 번 가 보고 싶어서, 대충 방향을 잡고 무작정 걸었다. 아, 그런데...

 

골목을 하나하나 돌고 명소를 하나씩 찾을 때마다 느껴지는 빈의 매력이란.

파리에 비하면 화려함도 떨어지고, 로맨틱한 분위기도 없다.

거리는 오히려 밋밋한 색의 지나치게 정연한 느낌의 건물 때문에 조금 심심했고, 우중충한 하늘 때문에 있던 매력도 안 보일 것 같은 도시였다.




그런데 해가 뉘엿뉘엿 지고 가로등이 켜지면서, 이 흐린 날씨에 오히려 점점 멋지고 매력적으로 바뀌어가는 게 아닌가. 어두워질수록 뭔가 중후하면서도 기품있는, 하지만 절대 음산하지 않은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 중후함에 반해서,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알베르티나 미술관으로 넘어간 이후로는 아예 목적지도 잡지 않고 그냥 걷기만 했다.

 


 

호프부르크에서 알베르티나 쪽으로 가는데, 웬 마굿간이 보이더니 이렇게 흰 말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 도심에 웬 말...?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 승마학교였다ㅋㅋ 아... 거 봐... 아무 생각없이 다니니까 좋은 걸 봐도 좋은 걸 본 줄도 모른다ㅋㅋㅋㅋㅋㅠㅠㅠ

 



교양이 없어서 그냥 패스한 알베르티나. 지금은 그저 후회하지요. 


알베르티나 미술관.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에서도 소개한 이 미술관은 건물 자체도 꽤 매력있던 걸로 기억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위인 알베르트 공의 컬렉션을 전시한 그의 옛 궁전인데, 이날 저녁 호스텔 룸메이트로 만난 브라질리언 베아트리스는 여기에 다녀와서 '너무 넓어서 다 둘러보는 데 반나절이 걸렸어ㅠㅠ'라고 이야기했다.

미술을 잘 모르고 딱히 보고 싶은 작품이 있던 것도 아니라 패스! 근데 여기서 피카소 전시회를 했었나 보네...ㅠ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호텔 자허가 있다. 이 건물 1층에 그 유명한 카페 자허가 있고,

사진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이 빈 슈타츠오퍼이다.



알베르티나 앞은 뭐 이런 느낌?


알베르티나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나가면 빈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뭐 이래 다 몰려있어?

 

그런데 그 '몰림'이, 빈의 이 우중충하지만 밤에 더 빛나는 매력과 어우러져 묘한 신비감과 낭만을 불러일으켰다.

야경이 예쁘기도 했지만, 골목을 하나씩 돌 때마다 보이는 미술관 또는 오페라 하우스가 이 도시가 얼마나 대단한 예술의 정점이었는지를,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예술 애호가가 모인 곳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에서 보낸 이후 며칠 동안에도 느낀 바이지만, 이 도시가 옛 대제국의 수도였음을 군데군데서 상기하게 되면서, 당대 유럽 정신까지 휘어잡았을 그 세기말 제국의 위엄이 어쩐지 이 아름다움과 어우러져 토종 한국인인 나까지 묘한 향수를 갖게 되었다 (물론 제국주의는 말고요...).

 

알베르티나를 지나 빈 미술사 박물관 쪽으로 향하면서, 나는 지금 빈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혈통으로 보나 국적으로 보나 개인 이력으로 보나, 여기 빈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완전한 타인인 내가, 이렇게 단지 걷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에 감화되어가는 이 기분이, 어색하면서도 신기했다.

심지어 난 미술이나 음악은 잘 알지도 못하는 교양 없는 여자인데ㅋㅋ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빈의 저녁 거리

약간 효과를 넣긴 했으나...ㅋㅋㅋ



 

레오폴트 무제움, 무막 등 빈의 내로라 하는 미술관이 모여있는 예술 구역, 무제움 콰르티어.


무제움 콰르티어 앞 마당에 서서 주위를 빙그르르 둘러보니





이런 그림이 보여 다가갔더니



빈 미술사 박물관 야경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비 오는 부르가르텐.


물론 난 이 도시의 표면만 훑은 셈이다. 난 여기 사람들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알지 못한다. 빈 사람들의 생활은 소위 '파리지앵 라이프 스타일'과는 달리 잘 알려지지도 않아서 책이나 영상으로 간접 체험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이 숱한 미술관을 바로 옆 골목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빈 사람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 혹은 살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었고,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이렇게 가까이서 단원과 혜원의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카페에서는 토익 스터디를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정의로운 삶인가에 대해 기분좋게 토론하면 좋을텐데. 가야금 독주회를 매일 저녁에 단돈 만원을 주고도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예술의 아름다움은 바로 내 옆에 있는다고 해서 퇴색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까이 있어야 그 매력이 증폭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느낄 때, 누구보다도 빡빡하게 살면서 지친 우리 마음을 달랠 수 있다고, 그것이 우리를 더 다정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태초에 예술이 존재했어라", 아닌가?

그 믿음을, 나는 빈에 와서 갖게 되고 또 확신하게 되었다.

 



스타벅스에서 나온 이후로 나는 그 어떤 건물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해가 지면서 기온은 엄청나게 떨어졌고 (찬바람이 어찌나 쌩쌩 불던지ㅠㅠ), 미술관도 다 문을 닫았을 것 같고, 커피는 이미 마셔서 카페에 들어갈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빈 어땠어?"라는 물음에, 난 "파리보다 더 로맨틱한 곳"이라고 대답했다. 정말로!

이 도시를, 이변이 없는 한, 그리워하며 다시 오게 될 날을 기다리게 될 것 같았다.

 

 


무제움 콰르티어 출구 쪽 벽에 써 있던 문구. 이보다 더 행복한 말이 있을까?